국가가 외면한 사이버성폭력 문제, 침묵하지 않은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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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다큐멘터리 '얼굴, 그 맞은편' GV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서울국제여성영화제(SIWFF, Seoul International Women's Film Festival)가 올해로 20회를 맞았다. 아시아를 중심으로 전 세계 여성 영화인을 발굴하고 제작 지원하는 데 힘쓰고 있으며, 여성영화를 전면에 놓음으로써 영화 다양성을 확산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CBS노컷뉴스는 서울 서대문구 메가박스 신촌에서 5월 31일부터 6월 7일까지 열리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상영작을 소개하고, 여성영화제에서 오간 '다양한 이야기'를 전한다. [편집자 주]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나흘째였던 지난 3일, 첫 공개된 다큐멘터리 '얼굴, 그 맞은편' (사진=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여성계의 오랜 요구와 정치권의 압박이 더해져 음란 사이트의 대명사로 여겨졌던 소라넷이 17년 만에 '공식적'으로 폐쇄됐다. 하지만 이름과 겉모양만 조금 다른 형태로 비슷한 사이트가 성업 중이다. 이용자들끼리 자료 공유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웹하드 업체 역시 불법촬영 영상이 쉴 새 없이 올라오고 공유되는 곳이다.

일부 남성 연예인들이 자신이 신체 건강한 남성임을 보여주기 위해 야동을 본다는 말을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할 정도로, 야동 관람은 남성이라면 으레 할 수 있는 '별 것 아닌' 일로 치부된다. 하지만 그중 상당수가 불법촬영물이다. 찍히는 줄도 모른 채 노출됐거나, 동의 하에 찍었더라도 외부 유출이 되리라곤 예상치 못했던 '피해자'가 엄연히 존재한단 의미다.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나흘째였던 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메가박스 신촌에서 다큐멘터리 '얼굴, 그 맞은편' 관객과의 대화가 열렸다. 조혜영 프로그래머의 사회로 진행된 행사에는 이선희 감독과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이하 한사성) 활동가들이 참석했다.

2017년 다큐멘터리 옥랑문화상 수상작인 '얼굴, 그 맞은편'(감독 이선희)은 간단한 검색어만으로 손쉽게 만날 수 있는 불법촬영물과의 '싸움'을 벌이는 한사성의 이야기다. 한사성은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비영리 여성인권운동단체로, 영상 삭제, 수사 및 법률 지원, 심리상담 지원 등을 통해 사이버성폭력 피해자들을 돕는 활동을 하고 있다.

영화는 묻는다. '피해자의 얼굴 그 맞은편에서 성폭력 영상을 소비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성폭력 영상을 유통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성폭력 영상을 제작하고 유통하고 삭제업체까지 함께 운영하는 범죄 카르텔이 구축되고 있는데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감독은 우선 관객에게 죄송하다는 인사부터 전했다. 영화제 일정에 맞춰 빠듯하게 출품하느라 사운드나 색 보정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날 상영분에는 불과 3주도 지나지 않은 지난달 17일 한사성의 기자회견 장면이 포함됐다. 아주 최근까지 촬영이 진행돼 왔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감독은 4년 전 과거 연인의 해킹에 의해 개인 사진이 노출돼 얼굴도 이름도 바꾼 한 여성의 사례를 우연히 접했고, 이 때문에 사이버성폭력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런 성적인 영상이 그 해만 해도 수천 건이 올라와 있더라"라며 "(제가 처음 접한 사건이) 하나의 우연한 사고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들여다보니 그야말로 카르텔이 있었고 잘 기획된 구조 때문에 여성들이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저는 예술 감각이 1도 없지만, 그냥 카메라를 무기 삼았다. 다큐를 찍는다고 하면 사람들 만나기가 편했다. 일종의 수단으로서 카메라를 든 케이스"라며 "20~30대 젊은 여성 대부분이 (사이버성폭력의) 타깃이 되고 있었다. 피해 당사자이거나 피해 당사자가 될 위험을 지닌 여성들을 만나고 싶었고, 그 속에서 촬영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 감독은 사이버성폭력 실태가 심각한데도, 이와 관련해 정부는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기도 했다. 그는 '얼굴, 그 맞은편' 포스터에 나타난 '국가가 비어 있는 자리에 선 여성들'이라는 문구를 언급하며 "사이버성폭력과 관련해 4년 동안 취재해 보니 이 영역에는 국가가 전혀 없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경찰도, 사법기관도, 입법기관도 어떤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다고 생각한다"며 "(여성을) 능욕하고 낙인찍고 산업화해서 국가권력과 일정 정도 유착하고 있는 세력이 있다. 그들과의 투쟁에 함께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메가박스 신촌에서 '얼굴, 그 맞은편'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김수정 기자)

 

한사성 대표 서랑 씨는 "감독님이 처음 (다큐) 제안 주셨을 때만 해도 박근혜 정권이었고 (그땐) 이 이슈가 그렇게 집중받지 못했다. 다큐가 찍힌다는 것에 감각도 없었던 것 같다"며 "1년 넘는 기간 촬영하면서 (영상에 담긴) 과정을 볼 때 되게 옛날처럼 느껴진다. 지금 하는 고민과 이슈도 달라진 것 같다. 우리가 성장했구나, 하는 것을 기록해 준 것에 감사하다"고 밝혔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큰 부담과 스트레스를 받는 일을 계속하는 원동력을 묻자, 한사성 활동가 효린 씨는 "제 생존을 위해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피해 당사자성을 갖는 여성으로서 안전한 온라인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명감이 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물론 그것 하나만으로는 현실적 고통을 이기긴 힘들다. 저로 인해, 우리 단체에서 하는 활동으로 인해 조금씩 회복하시는 피해자분들이 있다. 이것이 저희 내면에도 큰 치유가 된다고 본다. 제게도 큰 동력이 되고. 피해자의 감사의 말, 응원과 연대의 메시지가 내부 활동가들에게 굉장히 큰 자원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이날 관객과의 대화에서는 한사성 활동가 효린 씨의 어머니가 마이크를 잡고 한사성의 활동을 응원해 좌중을 뭉클하게 했다. 활동가 일부와 관객석에서는 눈물을 닦는 이들도 있었다.

효린 씨의 어머니는 "엄마이다 보니까 부모의 마음과, 같은 여자로서 자랑스럽고 대견한 마음이 있어서 우리 딸들에게 축복과 건강,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촬영해주신 감독님도 고맙다"고 전했다.

사이버성폭력 피해자 지원을 위해 일반인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도 나왔다. 한사성 여파 씨는 "사람들이 다 활동가가 될 순 없다. 이 일을 해결할 때 페미니스트 경찰, 페미니스트 변호사, 페미니스트 국회의원, 페미니스트 대통령, 페미니스트 상담자, 페미니스트 교사가 너무 필요한 거다. 저희(힘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 없더라. 계신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충분히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파 씨는 "(저희가) 어떤 활동을 할 때 함께 목소리 내 주시면 가장 좋겠다. 피해자에 대한 낙인과 한창 오고 있는 이 거대한 백래시(backlash, 반격)를 우리 힘으로만 막아내기 너무나 버겁고 두렵다고 느낄 때가 있다. 여기 오신 분들, 오지 못했더라도 분명히 이 문제에 분노하고 계신 모든 분들이 백래시를 막아줄 수 있는 방파제가 되어주실 거라고 본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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