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천마총 조사단 , 왼쪽부터 남시진, 지건길, 최병현, 박지명, 김정기 조사단장, 소성옥, 김동현 발굴팀장, 윤근일. 이 가운데 김정기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과 박지명 선생은 작고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김정기 소장님이 갑자기 모두 눈을 감으라는 거야. 그러더니 비밀 못 지킨 사람은 다른 데로 빼줄 테니까 손 들라고 하시더라고. 언론에 제보한 사람은 신고하라는 거지. 그런데 아무도 손 안 들었을 거야."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산하 경주고적발굴조사단 일원으로 1973년 경주 천마총 발굴조사에 참여한 원로들은 지난달 31일 전시관 재개관을 앞두고 천마총 안에서 자문회의를 한 뒤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점심을 들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김동현(81)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지건길(75)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 윤근일(71)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 최병현(70) 숭실대 명예교수는 한목소리로 당시 보안 유지에 대한 압박이 매우 심했다고 말했다.
지역 유지라고 할 만한 경찰서장도,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도 고분 안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이로 인해 "경찰이나 학계 관계자에게 밉보이기도 했다"는 것이 김동현 전 소장의 회고.
당시에는 귀중한 유물이 나오면 문화재관리국을 거쳐 청와대에 보고해야 했다. 그런데 자꾸 청와대 보고 전에 신문에 큼지막하게 기사가 나자 지금은 작고한 김정기 박사가 단원들을 채근했다.
특히 의심을 샀던 인물이 윤근일 전 소장이다. 경주에서 다른 조사를 하던 고(故) 정영호 박사가 제자인 윤 전 소장을 종종 불러 함께 막걸리를 마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제보자가 아니었다. 윤 전 소장은 단호한 어조로 "눈 감으라고 했을 때 아무렇지 않았다"며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할 겨를이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범인은 누구였을까. 훗날 단원들은 한 기자의 부인이 전화국 교환수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때는 시외전화를 하려면 교환수를 통해야 했는데, 통화 과정에서 보고 내용이 누설된 것이다.
김동현 전 소장은 "기자 부인이 교환수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일부러 문화재관리국에 일본어로 보고했다"며 "일본어로 말하니까 기사가 덜 났다"고 웃으며 말했다.
45년 전으로 시곗바늘을 되돌려 천마총 앞 거리에 막걸릿집이 늘어섰고, 원인이 황사인지 미세먼지인지 모르지만 대기가 깨끗하지 않은 날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주고받던 원로들은 윤 전 소장 말에 숙연해졌다.
"지나고 보니까 우리 정말 열심히 한 것 같아요. 당시로서는 할 수 있는 데까지 다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