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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제주' 서러운 침묵, 왜 70년 만에 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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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와 그 잔재에 시름해 온 '4·3' 자화상…"인권유린 강요된 망각"

제주4·3 70주년을 하루 앞둔 2일 4·3 행방불명인 유가족들이 제주시 봉개동 4·3 평화공원 내 표석을 찾아 희생자의 넋을 달래고 있다. (제주=CBS노컷뉴스 박종민 기자)

 

무려 70년이 걸렸다. 서울 등지에서 전국 단위로 제주4·3을 추모하는 분위기가 번지기까지 지난하게 버텨 온 길고도 긴 시간. 제주4·3은 왜 그토록 서러운 침묵의 세월을 70년 만에 깼을까.

제주도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12월 19일이 돌아오면 거의 모든 집에서 빠짐없이 제사를 지낸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48년 이날 하루에만 마을 사람 354명이 목숨을 잃은 까닭이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제사 지내는 것을 마치 풍속처럼 봐 왔다고 한다. 하지만 어른들 그 누구도 이유를 속시원하게 말해 주지 않았다. 강요된 침묵은 그렇게 반세기 넘도록 섬을 휘감고 있었다.

역사가 심용환은 2일 "우리나라에서 민간인 학살과 같은 민감한 주제를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1987년 민주화 이후에나 가능했다고 보면 된다"며 "그전까지는 독재정권이 매우 억압적으로 그러한 이야기를 못하도록 탄압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지난 1999년 '제주4·3특별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4·3은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없는 금기어였다. 특별법에 따른 진상조사 결과, 사망자는 2만 5000~3만명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 1에 달했다.

워낙에 가려졌던 일이다 보니, 특별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제주 사람들조차 4·3을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알고 있더라도 지난 세대의 비극으로 이해하려 했다. 4·3이 역사책에서 지워진 것도 모자라 '폭동' '사태' 등으로 왜곡돼 온 탓이다.

심용환은 "4·3을 겪은 어른들은 당시 이야기를 애써 들려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잘 모를 수밖에 없었다"며 "침묵으로 버텨 온 시간이 워낙 길다보니, 그 여파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피해 당사자들은 물론 4·3을 체험했던 이들은 여전히 여러 고민이 담긴 이야기를 쏟아놓는다"며 "아직까지 발굴돼야 할 이야기가 많아 보인다"고 했다.

"제주4·3 보고서와 같이 꽤나 체계화된 연구 성과가 있고, 제주 곳곳에는 추모 공간도 잘 조성돼 있다. 하지만 현재를 사는 우리가 그것들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잘 소화하고 있는가를 짚어보면 뼈아프다."

◇ "극단의 시대에 대한 디테일한 반성…제주4·3 재해석은 우리 시대 의무"

제주 4·3 70주년을 하루 앞둔 2일 관광객들이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너븐숭이4·3기념관 주변 학살지를 둘러보고 있다. (제주=CBS노컷뉴스 박종민 기자)

 

4·3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 동안이나 이어졌다. 해방 직후 남쪽에는 미군, 북쪽에는 소련군이 들어와 한반도가 냉전의 한복판에 서면서 벌어진 남북 단독정부 수립과 6·25전쟁에 걸쳐 있다. 전후 이승만 정권이 잔당 소탕을 명목으로 유혈진압을 벌이던 흐름까지 더해졌다.

심용환은 "1947년 냉전 시작과 이듬해인 1948년 제주4·3, 그리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1950년 6·25전쟁으로 이어진 역사적 흐름을 눈여겨봐야 한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와 함께 당시 미국이 전범국 일본을 반공국가로 키우려고 정책을 바꾸는 것을 이승만 정권이 몰랐을 리 없다. 남한 내에서도 강력한 우익 중심의 진영을 새롭게 짜야 한다는 강박이 컸던 것이다. 당대 확고한 우파였던 김구가 민족을 위해 중간파로 전향했던 사건 역시 미군정 입장에서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러한 현실을 고려하면서 세계 전략을 짠 미군정과 남한에서 정권을 유지해야 했던 이승만의 몹시도 냉정하고 이해타산적인 선택이 제주4·3에서 극단적인 형태로 드러났다"고 분석했다.

복잡다단한 4·3의 성격을 시대에 걸맞게 밝혀내는 일은 여전히 커다란 과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러한 맥락 안에서 "4·3에 대한 재해석은 우리 사회의 의무"라는 것이 심용환의 지론이다.

"재해석을 통해 우리 시대의 것으로 만들어두지 않으면, 결국 4·3은 추억거리로 남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에서는 역사를 '내 편이냐, 네 편이냐'를 따지는 수단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이명박·박근혜 시절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정권이 4·3을 좌익 흐름으로 봤고, 이에 대한 반발로 다소 감정적이고 정치노선적인 선택을 해 온 영향이 컸다."

그는 "4·3 보고서 등을 통해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인 제주에서 과거 수많은 사람이 비참하게 죽었다'는 양적인 설득은 어느 정도 됐다"며 "결국 이제 우리는 4·3의 구체성을 인정하고 다양하게 접근하는 질적인 연구를 통해 당대 인권 유린 현안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4·3을 경험한, 살아남은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인터뷰 등도 그러한 질적인 접근이 될 수 있다"며 "그렇게 4·3은 고발·폭로 단계를 넘어서 시대정신으로 자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을 고발함으로써 비뚤어진 권력 관계를 드러내는 미투운동과도 공명한다. 인권의식 성장과 더불어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더 나은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시대에 대한 디테일한 반성, 제주4·3이 우리 시대를 보다 평등하게 다지는 든든한 상상력을 제공할 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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