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후 7시 30분, 서울 마포구 교보문고 합정점 배움홀에서 은유 작가와 장수연 PD의 '일하는 여자들' 세계 여성의 날 특별 북토크가 열렸다. (사진=김수정 기자)
지난 8일 오후 7시 30분, 서울 마포구 교보문고 합정점 배움홀에 사람들이 모여앉았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 마련한 은유 작가와 장수연 PD 특강을 듣기 위해 자리를 채운 이들이었다. '일하는 여자들'이라는 콘셉트를 가진 여성의 날 특강이어서 그런지, 청중 대다수도 여성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 '여성의 글쓰기'가 갖는 의미'쓰기의 말들', '글쓰기의 최전선' 등을 쓴 은유 작가는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쓰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생활이 어려워진 탓에 서른 중반에 전업 작가가 된 그는 '분노'가 글쓰기의 동력이 됐다고 설명했다. 다만 거기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은유 작가는 "소모적인 글쓰기가 아니라 성찰적인 글쓰기로 나아가도록 노력했다. 누군가를 싫어해서 그가 나쁘다고 쓰는 것은 심판하는 글쓰기다. 그건 말로 해도 되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건 그걸 넘어서는 일이다. 타인의 입장이 돼서 그 사람은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사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은유 작가는 글쓰기로 인한 노동과 가사노동을 함께 하게 되면서, 내면화된 모성 이데올로기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공격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말에 어떤 의미가 들어있는지 살필 것을 권유했다.
"예를 들어 '저 여자는 성격만 싹싹하면 좋을 텐데…'라고 한다면 여기서 좋음은 '누구의 좋음'일까요? 또 여성은 감정적이라고들 하는데 감정적인 게 나쁜 걸까요? 이성적인 건 옳은 거고요? 제 생각을 돌보는 말들이 다 저를 돌보는 말이 아니더라고요. 가부장제 사회의 남성들과 힘 있는 사람들의 언어로 제가 사고한다는 것을 알았죠."
은유 작가는 "글을 쓸 때 맞닥뜨리는 제약이 있다. 여성은 스스로를 굉장히 사적인 존재로 규정하곤 한다. 여자는 집안일하고 남자는 바깥일 한다는 말도 그런 데서 비롯된 것"이라며 "저는 (일하면서) 살림을 해야 해서 (지식 습득 면에서) 절대적인 양이 부족했다. 남성들이 어떻게 그렇게 사회에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밥 짓는 어머니 등 여성의 희생을 갈아 넣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자신의 사적인 경험도 글의 소재가 될 수 있냐는 질문에 은유 작가는 최근 각 분야에서 쏟아져 나오는 '미투'(#Me_Too, '나도 말한다'는 뜻으로 성폭력 피해 경험을 드러내는 것)를 예로 들어 답했다.
그는 "남들에게 도움을 주는가를 보자. '미투'를 생각하면 된다. 성폭력 피해 경험 말하는 것은 험담, 사생활 노출이 아니라 구체적 경험을 털어놓음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연결점을 만들어 준다. '나도 말할 수 있겠다' 하는. 그럼 더 이상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보편적인 일이 된다"고 설명했다.
지난 8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 YWCA회관 앞에서 한국YWCA연합회원들이 '3.8 여성의 날 기념 미투운동 지지와 성폭력 근절을 위한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
그러면서 "성폭력 당했을 때 (여성이) 자책하는 이유도 가부장제 프레임 안에서 순결을 잃고 처신을 잘못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건 어디까지나 가해자 입장이지 피해자의 언어가 아니"라고 덧붙였다.
은유 작가는 "언어를 바꾸는 것, 그게 여러분들이 앞으로 하실 일이다. 여성의 목소리로 여성의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TV에는 남성들이 많고 그들은 남성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중에 퍼뜨린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이 글을 많이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상대방에게 용기를 주면 된다. 상처는 연결될 때 더 이상 상처로 남지 않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 딸에게 들려주고 싶은 4가지MBC라디오 PD이자 최근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를 펴낸 장수연 PD는 돈 버는 인간이 되기 전에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 것들을 4가지로 정리해 '딸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을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첫 번째는 '너의 몸은 관상용이 아니다'라는 메시지였다. 장 PD는 "가장 강렬하게 해 주고 싶은 말"이라며 "모성애, 의욕, 정신력, 열정의 다른 말은 체력이다. 체력이 이만큼 중요한지 몰랐다. 마른 몸이 좋고 아름다운 몸이라는 생각만 했지, 운동이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더라"라고 말했다.
두 번째는 '너는 앞으로 성폭력을 경험하게 될 거야'였다. 장 PD는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법한 기업 로고가 가득한 화면을 보여주며 이 회사의 공통점을 물었다. 모두 사내 성폭력 사건으로 기사가 났던 곳들이었다.
장 PD는 "이 자리에 앉아있는 모든 여성분이 다 성희롱과 성추행을 경험해 봤을 것이다. 모두가 그런 발언을 듣는다. 그러니 (어느 곳에나) 다 가해자가 있지 않겠나"라며 "아무리 조심해도 피해갈 수 없기에, 그런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디에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세 번째는 '네가 맞고 세상이 틀릴 가능성이 높다'였다. 그는 국립국어원에 나와 있는 페미니스트의 뜻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예로 들어 "국어사전이 틀릴 수도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장 PD는 "(여성의 미덕은) 순응하고 말을 잘 듣는 것이라는 가르침만이 너무 만연한 것은 아닌가. 내가 예민한가? 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너의 감정, 생각, 감각, 불편함, 불쾌함은 사소한 게 아니란 걸 알았으면 한다"고 전했다.
마지막 메시지는 '할 수 없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판단될 때 한 번 만 더 생각해 보기'였다. 장 PD는 "못하겠단 마음이 들 때 그게 혹시 내게 내면화된 사회적인 메시지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를 돌아보자"고 조언했다.
◇ "몰라도 되니까 그렇게 산 것, 무지도 권력"
왼쪽부터 은유 작가, 장수연 PD. 청중 질문에 장수연 PD가 답하고 있는 모습 (사진=김수정 기자)
각 20분씩의 짧은 강연 이후 미리 보내온 질문과 현장 질문을 바탕으로 한 두 사람의 대담이 이어졌다. 성별이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과 편견을 잘 모르겠다고 한 질문자에게 장 PD는 술자리에서 겪었던 일화를 들려줬다.
늦은 시간까지 계속된 술자리에 있자, '근데 왜 애 엄마가 이 시간에 술을 드세요?'라는 질문을 들었다는 것이다. 당시 질문한 사람이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라고 말해, '가르치면서까지 사과받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장 PD는 불편한 지점을 꼼꼼히 일러줬다고 한다.
장 PD는 "아기 엄마가 아니라 PD라는 정체성을 갖고 왔다. 여기 아기 아빠들도 있는데 그 어떤 아빠에게도 하지 않는 질문을 왜 엄마인 내게만 했나. 그건 편견이라고 했다. 불쾌한 질문을 받는 걸 넘어서서 그게 왜 불쾌한지까지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비슷한 상황을 다수 겪었다는 은유 작가 역시 "애는 누가 보고 있냐는 말을 오조 오억 번 들었다"며 "몰라도 되니까 그렇게 산 것 아닌가. 무지도 권력"이라고 꼬집었다.
가부장적인 시선을 씻어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느냐는 한 남성의 질문에 은유 작가는 "일단 말을 안 하고, 아내의 말을 잘 들어주면 된다"고 말해 환호를 끌어냈다.
그는 "수업할 때도 느끼는데 나이 많은 분들, 특히 남성들이 말씀하시는 걸 굉장히 좋아한다. 말하는 것도 훈련이라서, 말해본 사람이 더 말을 잘할 수 있다. 될 수 있으면 여성들 이야기를 많이 듣기를 바란다. 여성의 이야기가 (자기 안에) 많이 들어오면 감각과 눈치를 키울 수 있다"고 격려했다.
장 PD는 "그런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는 학문이 여성학이다. 저는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남성들은 본인이 경험할 수 없고, 모르는 분야니까"라며 "다른 어떤 학문도 모르는 걸 자랑스러워하면서 아는 거로 위축되지 않는데 페미니즘은 안 그렇다. 모르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고 알면 공격당하더라"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