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약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세상은 보다 정의로운 길로 나아갔습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을 증언하고 고발하는 '#미투'(#Me_Too)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는 이유겠죠. CBS노컷뉴스가 '#미투'라는 거울에 비친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그려봤습니다. [편집자 주][글 싣는 순서]
<상> 용기 낸 고백 '미투'… 2차 가해 않고 '위드유'하려면?상>(계속)
지난달 19일, 서울 종로구 30 스튜디오에서 연출가 이윤택의 성추행 사과 기자회견이 열렸다. 극단의 한 관계자가 '사죄는 당사자에게, 자수는 경찰에게'라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
"처음 시작은, '피해자를 생각하는 것'이에요. 피해자가 어떤 마음으로 글을 썼고,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오랜 시간 어떤 기분이었겠는가를 생각하고 위로하는 게 먼저예요. 가해자에 대해 분노하기에 앞서, 피해자의 입장을 생각하는 버릇을 들여야만 원치 않는 2차 가해라는 실수를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 극작가 박새봄 씨
자고 일어나면 또 일이 터져 있다. 창원지검 통영지청 소속 서지현 검사가, 얼굴과 실명을 드러내고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말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그의 폭로에, 이윽고 많은 이들이 동참했다.
자신의 피해 사실을 내보이는 동시에, 이런 가해가 가능했던 문화와 배경 등 뿌리 깊은 구조적 문제까지 분명히 짚는 '미투'(#Me_Too)는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한 달 가까이 한국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로 소비돼 오면서 부작용도 있었다.
피해자 고백의 신빙성과 목적을 의심하고, 신상을 강제로 들추려고 하며, 피해자에게는 아주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도 가해자는 더없이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발생하는 '2차 가해'가 대표적이다.
◇ 폭로가 더뎠던 배경에는 '2차 가해 문화'가 있었다
'인당수 사랑가' 등 다수 공연의 대본을 써 온 극작가 박새봄 씨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2차 가해 문화가, 오랜 시간 피해자들을 옥죄고 있었다고 진단했다. 그는 "'터질 게 터졌다'고들 하는데, 그간 너무나 많은 성범죄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는 모두가 합의했던 게 아니라, 누군가는 견뎌야만 했던 문화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왜 이제야 터졌을까. 지금까지는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 작가는 "가해자 한 사람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2차 가해 문화가 너무 만연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미투 운동'은 '2차 가해'에 맞서 함께 싸워줄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용기를 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위드유'라고 하며 함께 싸울 준비가 된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인지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2차 가해'란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하는 것일까. 박 작가는 "어떤 사람이 피해를 겪으면 그 사건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 구경꾼들, 구경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그럴 만했다', '너도 뭔가 기대한 거 아니야?', '둘 다 잘못한 거 아니야?'라는 말로 여러 가지 2차 가해를 해 왔다"고 답했다.
가해자를 정확히 지목하지 않는다며 피해자를 채근하는 것 또한 2차 가해다. 박 작가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특정하지 않았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나. 사실적시 명예훼손 등 지금의 법은 피해자를 살피지도 않는다"며 "가해자에 대한 분노로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것을 알아내려고 하는 지점부터는 잘못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피해자들의 폭로로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된 문화예술계 인사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배우 조민기와 조재현, 연출가 오태석과 이윤택 (사진=노컷뉴스 자료사진)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의 김현지 활동가 역시 '피해자 신상털기'와 '피해자 탓을 하는 발언' 등을 2차 가해의 예로 들었다. 김 활동가는 "'왜 그 자리에 갔느냐'며 의심과 받는 일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반복된 일이다. 그러니 이야기를 주저하게 되고, (사건이) 은폐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활동가는 "피해자의 행실, 외모를 품평하는 일이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피해자 얼굴, 피해자 이름 등이 검색어에 오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 관심을 가해자와 가해에 동조, 협력 혹은 침묵했던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는 데로 옮겨야 한다고 본다"고 제언했다.
'2차 가해'는 오히려 가해자에게 함께 분노하는 평범한 이들마저 뜻하지 않게 저지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박 작가는 악의를 가진 몇몇 별난 사람들만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고 봤다.
"('미투 운동'에서) 공작정치를 운운하는 것 역시 2차 가해죠. 2차 가해와 관련해 감각이 무딘 사람들은 선량한 의식이 있더라도 2차 가해를 할 수 있어요. 누구 하나를 악마화하고, 언론이나 몇 사람의 자극적인 2차 가해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것에 동조하거나 비난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피해자들은 그 시간을 오래 견뎌야 했어요. 공소시효가 지나기 전에, 좀 더 빨리 말할 수 없었던 건 수많은 사람이 2차 가해에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피해자 두 번 울리는 언론의 '2차 가해''미투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언론이다. 피해자들의 자기 고백을 널리 확산하고, 사실관계와 수사나 활동 변화 등 '이후의 상황'을 확인해 대중에게 알리는 일을 맡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론은 동시에 피해자들을 곤란하게 하는 데에도 앞장서고 있는 게 사실이다.
언론시민단체인 민주언론시민연합이 2월 1일부터 26일까지 KBS·MBC·SBS·JTBC·TV조선·채널A·MBN 등 지상파와 종편 방송사, 각종 신문·인터넷 매체의 '미투' 보도를 분석해 보니, 여성가족부와 한국기자협회 등이 함께 만든 '성폭력 범죄 보도 세부 권고 기준'과 한국여성민우회의 '성폭력 보도 가이드라인'을 어긴 보도가 속출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요약하면, △피해 사실을 선정적·구체적으로 묘사하고 △피해자·폭로자의 신상 정보를 강조하며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부담을 주고 △가해자 측 입장을 온정적으로 다루며 △명확하지 않은 용어 사용으로 범죄 심각성을 희석하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성폭력 사건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언론개혁시민연대의 권순택 활동가는 "'미투' 보도가 폭로 중심으로만 제한되고 있고, 그조차 너무 선정적이다. '더 센 것 없냐'는 식으로 흥밋거리로 소비하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특종 중심으로만 사안을 바라보다 보니 '미투 운동'도 나중에는 묻히고 없어지는 과정을 겪을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서지현 검사는 지난 1월 29일 안태근 전 검사장에게 당한 성추행 사실과 조직의 은폐를, 연극배우 엄지영 씨는 지난달 27일 배우 오달수에게 당한 성추행 사실을 밝혔다. (사진='뉴스룸' 캡처)
권 활동가는 '미투 운동'에 불을 붙였던 서지현 검사 인터뷰를 예로 들어 언론의 접근·보도 방식을 비판했다. 그는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반복해서 말하게 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성폭력은 동의 여부가 중요한데 저항 여부를 따지는 것, 피해자 의사와 무관하게 언론이 가치판단을 담아 질문하는 것도 문제"라고 설명했다.
권 활동가는 "피해자들이 더 용기를 내야 한다"거나, "왜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실명을 밝히지 않나"라고 문제를 제기하는 보도를 거론하며, 피해자에게 '미투'를 요구하는 태도 역시 지적했다. 또한 "도덕적 잣대를 적용해 피해자를 '구별'하는 것 역시 굉장히 문제가 있었다. '피해자다운' 모습을 정해두고 벗어나면 비난하는 그 자체로 2차 가해다. 가해자의 '스피커'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김 활동가는 가해자의 시선으로 '피해자 탓하는 보도'를 문제 삼았다. 김 활동가는 "각 분야의 성폭력과 성차별적인 관행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 때문에 어떤 업계가 흔들린다는 식으로 책임 전가를 하거나, 소위 '조직 보위의 논리'로서 피해자를 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피해자의 증언 때문에 혼란이 빚어진다는 식으로 보도하는 것을 보면, '언론은 정말 반성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만 든다"고 말했다.
물론 약소하게나마 긍정적 변화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피해자와 욕망에 사로잡힌 괴물처럼 가해자를 그리는 관행이 있었다. 성폭력 피해자, 가해자에 관한 고정관념을 고착화할 뿐, 우리가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성찰은 하나도 던져주지 못했는데 요즘 이 부분은 조금 나아지고 있는 것 같다. 가해자 이름을 붙여 사건을 부르는 것도 변화 중 하나"라고 말했다.
반면, 박 작가는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언론의 2차 가해'를 상수로 바라봤다. 박 작가는 "사실 이 문제뿐 아니라 언론은 언제나 어뷰징을 통해 돈을 벌어 왔기에, 언론만 공격하는 건 의미가 없다"면서 "2차 가해는 무척 특별한 어떤 사람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 '2차 가해' 대신, 우리가 해야 할 일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악의가 없어도 가능할 수 있다는 '2차 가해'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것은 '피해자 중심주의'다.
박 작가는 "고발한 피해자의 삶이 망가지지 않길 바라면서 그에 합당한 일을 하면 좋을 것 같다. 이미 말한 사람들 외에도 '아직 말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성숙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피해자들은 (폭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포르노처럼 전시하는 그 '역겨움'을 견디고서라도 내 문제를 꺼내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5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 연극·뮤지컬 관객들의 '미투' 지지 집회 (사진=유연석 기자)
"'피해자인 게 훈장이냐'라는 말이 이 사회에 박혀 있는 '2차 가해 문화'를 그대로 보여주죠. 엄청난 일을 당해서가 아니라, 아주 작은 일이라 해도 성적으로 차별받았던 모멸감을 기억해 말했고 이 같은 일이 더 이상 일어나선 안 된다고 선언한 거예요. 피해자들을 거룩하고 불쌍하게 만드는 익숙한 서사가 지금도 반복되지만, 피해자들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자존을 지키기 위해' 말한 것입니다."
그는 "'미투'는 과거 일에 대한 사적 복수가 아니"라며 "피해자들은 자신의 친구들, 후배들, 제자들을 걱정하며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전했다.
"피해자들의 '미투'는 다시는 그것(성폭력)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본인의 삶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선택입니다. 주변인과 또 다른 피해자들에게 힘이 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것이고요. 당당하게 피해를 고발한 이들에게 피해자성만을 강조하는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매우 무례한 시각이라고 봐요. 피해자를 존중하라는 건 불쌍히 여기라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얼마나 용감한 일을 했는지의 시각으로 본다면, 이 사안이 다르게 보일 거예요."
박 작가는 '왜 연극계에서 이런 일이 유난히 더 자주 일어나는가' 하는 질문은 본질을 흐리는 '게으른 현실 직시'라고 꼬집었다. 그는 "어디에서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만,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고발하겠다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이곳에 많을 뿐"이라며 "아직도 꿈과 희망을 품은 이들이라 그렇다. (가해자들로 인해) 무대가 더럽혀지면 안 되고, 잘못하고도 인간에 대해 작품을 만들고 무대에 올릴 수는 없다는 어쩌면 순진하고 어쩌면 굉장히 건강한 생각을 하고 있기에 발언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활동가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보면서 우리는 각자 위치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위계와 권력 속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성폭력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지 않나. 그런 상황을 맞닥뜨릴 때, 내가 몸담은 조직에서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깊이 성찰하고 숙고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본다"고 전했다.
권 활동가는 "'남자라면 그럴 수 있다', '너를 사랑해서 그러는 거다'(낭만화)→'강간도 아닌데 유별나게 반응하는 것 아니냐'(사건의 사소화)→'아직도 그러고 있니?', '너 진짜 독하다. 어디까지 바라는 거야? 네가 요구하는 게 뭐야?'(피해자 비난)→'걔도 힘들어하더라'(가해자 옹호) 등 2차 가해는 마치 공식처럼 진행된다. 이전에 그래왔듯 언론이 무거운 주제를 '흥밋거리'와 '특종'으로만 접근한다면, 이런 가해를 똑같이 저지르는 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