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월화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 윤지호 역을 맡은 배우 정소민 (사진=박종민 기자)
지난달 28일 종영한 tvN 월화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조용하면서도 강한 드라마였다. 요란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2017년 현재를 살아가는 2030 세대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데 성공해 시청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꾸준한 시청률 상승으로 마지막회에서 자체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지만,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꽤 잡음이 있었다. 배우 이민기가 지난해 2월 여성으로부터 성폭행 및 집단 성추행 혐의로 피소 당한 후 처음으로 복귀(경찰 조사 당시 무혐의 처분)하는 작품이었고, 지난해 일본 TBS에서 방송된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와 세부 설정까지 유사해 표절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자기 집이 있는 달팽이를 가장 부러워하는 홈리스 윤지호 역을 맡은 정소민은 흔들림 없이 자신의 몫을 다 해냈다. 세상이 붙여 준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으로 고달픈 삶을 사는 서른 살 윤지호는 정소민 본인과 친구들의 이야기 그 자체였다.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이번 생은 처음이라' 종영 기념 배우 정소민의 라운드 인터뷰가 진행됐다. 대본을 처음 봤을 때 자신과 닮은 점이 많아 깜짝 놀랐다는 정소민은, 지나가는 말 한 마디에서도 작품에 대한 애정이 느껴질 만큼 '이번 생은 처음이라'를 각별하게 여기는 듯했다.
◇ "위로 받은 작품… 글이 너무 재밌었다"홈리스 윤지호와 현관만 내 집인 하우스 푸어 집주인 남세희(이민기 분)가 한 집에 살면서 서로에 대한 사랑이 싹트게 된다는 이야기. 월세 결혼이라는 계약관계를 벗어난 두 사람이 오로지 '사랑'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결혼 계약을 맺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정소민은 "현장 분위기도 너무 좋았고 무엇보다 크게 아프거나 다치는 사람 없이 무탈하게 끝나서 좋았다"고 종영소감을 전했다.
이어, "보시는 분들이 많이 좋아해 주셔서 행복하게 잘 마무리했다. 드라마 마치고 연말도 만끽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덧붙였다.
정소민은 '이번 생은 처음이라'가 시청자들의 마음을 두드린 이유로 '위로'를 들었다. 이는 동시에 정소민이 작품을 선택하게 된 결정적 이유이기도 했다.
그는 "저 역시 연기를 하면서 위로를 많이 받았다. 너무 글이 재미있었고, 배우들의 연기를 감독님이 잘 편집해 주셔서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정소민은 기억에 남는 내레이션으로 2회 터널씬을 꼽았다. (사진='이번 생은 처음이라' 2회 캡처)
담담한 톤으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잔잔히 울렸던 지호의 내레이션 역시 인기 요인 중 하나였다. 정소민은 "꿈을 먹고 살겠다고 결정했을 때, 이제부터 내 인생은 깜깜한 터널을 혼자 걷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깜깜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외로울 줄은 몰랐다"(2회),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11회) 내레이션이 기억에 남는다고 꼽았다.
정소민은 "2회 때는 장면을 보면서 내레이션을 하는데, 조감독한테 그런 일(성폭행)을 당할 뻔했을 때, 집에 못 들어가고 터널로 들어갈 때 실제로 눈물이 되게 나더라"라며 "복받치는 감정을 누르면서 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서로 연기를 주고받는 것보다 혼자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내레이션이 더 힘든지 묻자, 그는 "지호라는 사람이 밖으로 내뱉는 말보다 속에서 돌리는 말이 많고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런 설정이) 잘 맞아 떨어졌던 것 같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내레이션은 지호 일기라고 생각하면서 했다. 대본에는 (나와 있지 않은) 순간들도 많지 않나. 한 사람의 삶이라고 봤을 때 대본에 그려진 건 극히 일부니까. 대본 사이사이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캐릭터 관련) 일기를 쓰는데 그 도움을 되게 많이 받았다"고 덧붙였다.
◇ 정소민이 말하는 윤지호와 닮은 점, 다른 점윤지호는 주머니가 가벼운 처지지만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일이라면 펜을 내려놓는 강단도 지니고 있는 캐릭터였다. 사랑 앞에서 한없이 솔직하고 가슴 뜨거운 면모를 보인 것도 윤지호의 특징이었다.
정소민은 시놉시스를 봤을 때부터, 자신과 많이 닮아 있는 윤지호를 보고 신기해했다고 전했다. 지금까지 맡았던 배역에서도 한두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지만, 윤지호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는 설명이다.
"저도 가족이 네 명인데 남동생이 있어요. 지호 동생 역을 맡았던 배우와 제 동생 나이가 똑같고요. 그래서 연기하기가 너무 편했어요. 전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부산 분, 어머니가 진주 분이셔서 경상도 가정만의 특유의 분위기를 원래 알고 있었어요. 저 역시 지호처럼 꿈을 찾겠다며 아버지 반대를 무릅쓰고 학교 시험을 몰래 봤어요. 고등학교 때 갑자기 친해지게 된 친구가 여전히 친한 것, 그런 점도 되게 비슷해요. (이 얘기를 듣고) 작가님도 되게 놀라시더라고요."
상처 받았을 때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면은, 윤지호에게서 본받고 싶은 점이었다. 정소민은 "상처 받았을 때 나를 지키는 방법을 보고 되게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저한테 스며들어와 있다는 게 느껴졌다. 뭔가 득템한 기분? 능력치를 쌓았다"며 웃었다.
지난달 28일 종영한 tvN 월화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 (사진=tvN 제공)
그는 "제가 모든 면에서 소심한 건 아닌데 유독 끙끙대고 그럴 때가 있다. 자기 전에서야 '아, 이렇게 말했어야 되는데…' 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지호의 그런 점이 유독 높게, 멋지게 보였던 것 같다. (그런 점을) 갖고 싶었다"고 부연했다.
실제 성격보다 더 솔직하고 시원한 구석이 있는 윤지호 연기를 하며 후련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지호 입장에서는 그런 말을 하는 게 편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되게 용기 내서 하는 소리"라고 답했다.
정소민은 "지호를 연기하며 느낀 건, 누군가 나를 미워해도 좋다는 용기를 내는 중이라고 봤다. 무책임하게 내가 내 할 말을 하고 끝내겠다, 이게 아니라 나 미워해도 좋은데 나는 이런 상처를 받아서 너무 아프다고 얘기할 수 있다는 건 되게 성숙한 부분인 것 같다"고 말했다.
정소민은 불만을 묻거나 참는 성격이어서, 자아가 공격받았을 때 "내가 당신들 때문에 상처를 받아 아프다" 하고 투명하게 꺼내놓을 수 있는 윤지호의 모습이 멋있게 느껴졌다고 고백했다. 직언을 하는 게 쉬워 보이지만 "듣는 사람에게 미움 받을 용기"를 내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정소민은 알고 있었다.
◇ "88만원 세대, 먼 얘기 아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홈리스, 생계형 연애 포기자,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의 약자로 오직 한 번뿐인 인생을 즐기자는 주의) 세대 등 요즘 청춘들의 다양한 모습들이 녹아 있는 작품이었다.
윤지호는 '88만원 세대'인 88년생 서른 살 드라마 보조 작가였다. 불안정 노동과 저임금으로 대표되는 '88만원 세대'를 연기하는 정소민의 마음가짐은 어땠을까.
"88년생뿐 아니라 그 언저리에 모든 청춘들이 같은 시기를 겪어왔잖아요. 저는 89년생이거든요. 거의 동갑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죠. (제가) 지호랑 한 살 차이인데 진짜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굉장히 롤러코스터를 많이 탔던 세대였던 것 같아요. 그 세대에 대한 이야기이니 공감할 수밖에 없었어요. 저와 제 친구들 역시 그런 시간을 지나왔으니까. 그래서 동 세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던 것 같아요."
극중에서 지호와 세희가 엮이는 계기 역시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소민은 각자 아픔과 빈틈을 지니고 있는 두 사람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었기 때문에 그 만남이 의미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하우스 푸어와 홈리스가 단지 그 집과 월세를 필요로 하는 두 사람이 만나는 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되게 상처 받은 두 사람이 만나서 위로하는 과정이 너무 좋았다"고 밝혔다. "미완성된 사람 둘이 만나 서로를 채워주는 것"이기에 특히 좋았다고.
◇ '이번 생이 처음이라'에서 처음 느낀 것들
배우 정소민 (사진=박종민 기자)
누구나 한 번 사는 인생인지라, 모두에게 '이번 생'은 '처음'이다. 정소민은 이번 작품에서 어떤 것을 처음으로 느끼고 경험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는 조금 고민하더니 이내 '이렇게까지 분위기가 좋을 수가 있나' 싶었다고 밝혔다.
"현장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요, 말도 안 되게. (박)병은 선배님도 그런 말씀을 계속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저께 (박준화) 감독님 전화를 받았는데 방금 가족들이랑 재방송을 봤는데 너무 허하다고 하셨어요. 그 말을 들으니까 정말 뭉클했어요. 저만 현장을 그리워하는 게 아니구나, 해서요. (드라마 촬영 현장이) 체력적으로는 너무 힘든 상황이잖아요. 그럼에도 그게 그립고, 이 사람들이 다 다시 모여서 또 작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쉽지 않은데 모두 그런 생각이었어요. 스태프까지 100명 넘는 사람들 중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 그대로 작품을 했으면 좋겠어요."
'처음'인 이번 생이 아니라 '다음 생'이 주어진다면 정소민은 무엇을 하고 싶을까. 그는 "안 태어나도 돼요!"라고 말해 좌중을 빵 터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다시 태어나도 지금처럼 배우를 하고 싶다는 마음만은 변함없었다.
"직업적으로 얘기하자면 또 배우를 하고 싶어요. 재밌고 저한텐 매력적인 직업이라서. 하면 할수록 배울 게 더 생겨요."
(노컷 인터뷰 ② 정소민 "연기하며 나도 모르는 나를 발견해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