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 보수는 "보수답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시대의 준엄한 요구에 직면했습니다. 대한민국을 더 나은 미래로 이끌 한 축으로서 건강한 보수는 어떠한 얼굴을 지녀야 할까요. 해방 뒤 한국 보수가 걸어온 오욕의 길을 파헤친 전문가들의 날카로운 진단을 전합니다. [편집자주][글 싣는 순서]
① 그런데 이명박은 '보수'입니까?② 노무현이 '보수의 나라'에 뚫은 숨구멍③ 끈 떨어진 '박정희' 붙드는 요지부동 구태④ "모든 적폐는 '이승만의 승리'에서 비롯됐다"<끝>
지난 2008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찾은 방문객들을 맞이하면서 모자를 쥔 채 활짝 웃고 있다. (사진=노무현재단 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지금이야 보수와 진보가 공개적으로, 또 분명하게 자기 색깔을 드러내고 있지만, 2002년 당시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 나와 '나는 진보'라고 공개적으로 얘기하기 전까지는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의 분화는 없었다."
한국 정당정치 연구의 권위자인 김용호(인하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2002년 이전까지 정치학자·정당연구가·언론인들이 늘 지적해 왔듯이 한국의 정당은 보수 일색이어서 이념의 분화가 적었다"며 말을 이었다.
"예를 들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진보인가'라고 물으면 손사래를 쳤다. '국민 모두를 대표하는 세력이지 진보만을 대표하지는 않는다'며 '국민정당'이라는 점을 굉장히 강조했다. 분단 상황에서 진보 세력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그런데 2002년 당시 노무현 후보가 대선에서 처음으로 그 신화를 깼다. 엄청난 정치적 위험부담을 안고 말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도권 정치 안에서 보수와 진보의 대립 구도를 열었다는 데 강원택(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역시 "동의한다"는 뜻을 밝혔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투사였다. 이전의 권위주의 대통령들과는 분명히 결이 달랐지만, 큰 틀에서 보면 두 분 모두 보수다. 정치적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과거 민주당의 구파,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같은 당 신파와 만나게 된다. 두 분 모두 근원적으로 정치 경쟁의 자유와 민주화를 요구했지만, 이념적 큰 틀 안에서 보면 한국 보수나 기존 기득권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은 출신도, 성향도 그동안 전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스타일의 정치인이었다"며 진단을 이어갔다.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터져 나왔던 여중생 사망 사건과 그것을 통한 이념적 차별화, 그러니까 당시 노무현 후보는 매우 보수적이던 경쟁자 이회창 후보와의 이념적 차별화를 시도했다. 여기에 당시 매우 진보적인 대학 경험을 지닌 386세대가 호응하면서 한국에서 진보적 이념이 터져나왔다."
◇ 노무현 정부 탄생, 보수세력 위기의식에 불을 지피다
지난달 21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 '박근혜 정치투쟁선언 지지 태극기집회' 집회물품 판매소에 권양숙 여사의 구속을 요구하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노컷뉴스)
노 전 대통령의 진보 정치 선언에 한국 사회가 호응했던 데는, 민주화 이후 시대 분위기를 자연스레 체득한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 큰 몫을 했다는 분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역사가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은 "민주주의를 상식으로 받아들인 세대 교체에 주목해야 한다"며 "이전 세대와 달리 1987년 민주화 이후 자유민주주의를 당연하게 여기게 된 세대의 성장이 기존 보수 중심 정치지형에 변화를 가져왔다"고 봤다.
"노무현 이후 한국 사회는 87년 민주화 이후 세대가 전면에 등장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1970년대 후반부터 태어난 세대가 의식을 다질 무렵의 대통령은 노태우·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었다. 앞서 박정희·전두환을 경험한 지금의 60대와 70대, 반 전두환 세대인 50대와는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심 소장은 "이전 세대의 역사관이 '독재'와 '민주'의 대립구도라면, 87년 6월항쟁 이후 세팅된 자유민주주의 형식에서 자유롭게 살아 온, 이른바 '응답하라' 세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입장을 상식의 선에서 큰 거부감 없이 수용하고 지지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결국 "촛불혁명을 통해 이명박과 박근혜를 거부했던 젊은 세대는 이전 세대의 진보적 가치를 계승했다기보다는, 민주화 이후 몸으로 체득한 '상식'과 '합리'를 무기로 비상식과 비합리에 저항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등장한 노무현 정부는 보수에게 가해진 커다란 일격이었다. 보수세력을 결집하도록 만든 위기의식에 불을 지핀 것이다.
김용호 교수는 "(노 전 대통령이) 저렇게 공개적으로 나오는 데 대해 보수는 무방비 상태였다"며 "노무현 정부 때는 보수가 엄청나게 당황하는 시기였고 이념·사상 무장, 특히 온라인의 정치 캠페인 등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움직임이 일었다"고 복기했다.
"저 역시 당시 '노사모' 등의 온라인 활동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다. 왜냐하면 미국 등 다른 나라를 보면 온라인을 장악하는 세력은 대개 보수였다. 일반적으로 자본이 풍부하고 교육 수준도 높은 보수 세력이 온라인을 새로운 정치 영역으로 선점해 온 것이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우리나라는 진보 세력이 온라인 주도권을 장악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특별한 현상이다."
한국 보수주의의 이념적 특징과 역사를 연구해 온 정치학자 이나미(한서대 동양고전연구소) 연구위원은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을 기점으로 보수 담론이 속속 등장했고, 노무현 대통령 당선 초기 깜짝 놀랄 만큼의 대규모 보수집회가 열렸다"며 "그간 진보단체에서 주로 써 왔던 집회·시위 등의 방식을 보수단체가 두드러지게 활용하기 시작한 시기였다"고 전했다.
◇ 남북 분단이 낳은 한계지점…"대한민국은 보수의 나라"
지난 13일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주최로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서 열린 '박정희 동상 기증식'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사진을 든 한 참가자가 동상건립 반대 기자회견을 하는 시민단체를 향해 고함치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노컷뉴스)
김대중 정부에 이은 노무현 정부의 탄생은 이렇듯 보수세력의 공고한 결집과 조직적인 대응을 낳았다.
강원택 교수는 "보수가 결집하고 담론을 만들기 시작한 때를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로 본다"며 "그 전까지는 거의 모든 사람이 보수에 가까웠기 때문에 보수진영에서 특별히 결집하거나 위기감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대선 중에도 '반미가 왜 나쁘냐'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한국의 주요 정당 후보 중에서 그런 말을 한 사람은 노 전 대통령이 처음이었다. 이후 나왔던 과거사 청산, 국가보안법 폐지 발언, 북한과의 우호적인 관계 맺기 등에 보수는 크게 긴장했고 정치적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이어 "물론 김영삼·김대중 정부 때도 이러한 갈등이 없지는 않았지만, 본격적인 이념 갈등이 이뤄지고, 색깔 공방으로까지 격화 되면서 보수가 결집한 것은 노 대통령 당선 이후"라고 부연했다.
강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대한민국은 보수의 나라"다. 남북 분단 체제라는 한계 안에서 한국 사회 주요 정당들이 여전히 보수 색깔을 띠고 있다는 진단에 따른 것이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치러진) 1948년 5·10 선거에서 좌파는 이미 불법화 된 상황에서 선거 반대 투쟁을 했다. 민족주의 중간파인 김구·김규식으로 대표되는, 지금 맥락에서 보면 한국의 진보 세력들도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보수 세력을 중심으로 국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
그는 "그 뒤에도 이념적으로 한국 사회는 계속 좁혀져 왔다. 제2공화국 당시 이승만과 야당인 민주당 사이 갈등도 본질적으로는 이승만의 장기집권, 부정선거, 자의적 지배에 대한 불만이었다"며 "이념적으로 봤을 때는 민주당이나 (이승만을 지지했던) 자유당이나 모두 보수 세력이었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 이후에도 반공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주의는 더욱 강화됐고, 박정희가 1961년 쿠데타를 일으켜 반공을 제1 국시로 만든 이래 반공에 기댄 보수화는 더욱 강화됐다. 이승만 때도 그랬지만 그것이 보수의 중요한 지배 이데올로기로 오랫동안 작용해 온 것이 사실이고, 오늘날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정치철학자 박동천(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딱히 사회주의가 아니더라도, 아주 넓은 의미에서 진보를 정의하더라도 문재인 정부 역시 굉장히 온건한 진보로 분류할 수 있다"며 "가령 '장준하 사망' '천암함 사건' '연평도 포격' 등과 관련한 의혹을 파헤칠 수 있을까를 보면 어려워 보인다"고 봤다.
이어 "이러한 의혹을 건드리지 못한다면 진보의 범위를 아주 넓게 잡더라도 굉장히 제한적이고 온건한 수준의 진보가 된다"고 진단했다.
◇ 철 지난 '좌빨' '종북' 공포심리에 의존…갈수록 입지 좁아지는 보수
지난 6일 열린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자유한국당 전희경(왼쪽) 의원과 임종석 실장이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이날 전 의원은 전대협 의장 출신인 임 실장을 향해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종하는 주사파들이 청와대를 장악했다"고 색깔론 공세를 펼쳤다. 이에 임 실장은 "5·6공 때 정치군인들이 광주를 짓밟을 때 인생을 걸고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했다"며 전 의원에게 "그게 질의냐"고 맞받아쳤다. (사진=자료사진/노컷뉴스)
한국 사회가 강한 보수성을 벗어던지기 어려운 환경에 대해 심용환 소장은 미국의 개입이라는 역사적 맥락 안에서 짚어본 분석을 내놨다.
"냉전 체제 당시 미국 입장에서는 동맹국들이 적극적인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자리잡으면 좋았겠지만, 한편으로는 반공주의만 철저하게 유지시키면 된다는 경향이 강했다. 다시 말해, 반공이라는 명분 아래 선거 등 민주주의의 형식적인 기본 틀만 유지하면 독재국가마저 용인했던 것이다. 결국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 역시 실제로는 독재국가이지만, 자유민주주의 형식을 최소로 유지함으로써 미국의 동맹체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방식을 썼던 것이다."
그는 "군사독재 시절 반독재 투쟁 역시 지금 우리가 누리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가자는, 굉장히 온건한 진보로 볼 수 있다"며 "민주화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러한 체제 안에서의 개혁을 목표로 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도 온건성을 견지하면서 조금 더 양심적인 유럽식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자는 의지였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현대사 맥락 안에서는 공교롭게도 독재정권 역시 반공을 극대화시킨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가 되는 셈이다.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도 안전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범주 안에서 독재와 대립함으로써 우리 사회는 제도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해야 한다는 합의 담론을 다졌다. 그것이 87년 6월항쟁을 통해 확립 됐고, 지난 겨울 촛불혁명을 통해 재확립 됐다. 결국 우리나라는 보수적 역동성에 의해 지금까지 이어온 나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나미 연구위원은 "우리나라 보수 이념 자체는 내용이 체계적이지 않다. 그래서 자기 진영에게 유리한, 자원이 될 만한 것은 모조리 동원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며 "이념적 논리 체계보다는 반공주의에 기댄, 안전·공포 등의 심리에 민감한 사람들이 보수진영에 다수 포진해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 보수 세력이 공동체의 미래를 고민하는 진정한 보수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간 '종북' '좌빨' 등의 표현에서 단적으로 드러내 온 무차별적으로 반공주의를 벗어던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연이은 실정으로 궁지에 몰린 보수진영을 향해 김용호 교수는 "상대를 '종북' '좌빨'이라고 공격하는 것부터 멈춰야 한다"며 "우리나라 보수의 가장 큰 약점은 반공주의에 기대어 독재를 정당화하는 식으로 먹고 살아 왔다는 점"이라고 꼬집었다.
박동천 교수 역시 "보수는 여전히 안보 문제를 갖고 장사해 온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 보수 세력이 과거에 치명적으로 잘못했던 부분"이라며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개과천선하지 않으면, '우리가 잘못 판단했던 것'이라고 인정한 뒤 털고 가지 못한다면 보수에게는 그 어떠한 가치도, 미래도 없다"고 비판했다.
[③ 끈 떨어진 '박정희' 붙드는 요지부동 구태] 편에서 계속
CBS노컷뉴스 이진욱 기자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