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도 깨우는 죽비소리 "나라도 외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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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0-2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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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의 날 특집 ②]

글 싣는 순서
① 92세 재일교포 일본에서 독도를 외치다
② 열도 깨우는 죽비소리 "나라도 외쳐야죠"


윤영하 할아버지는 일본 오사카에서 독도 역표 현수막을 붙인 트럭을 몰며 거리 홍보전을 펼쳐왔다.

 

◇ 日 오사카 현지 독도 홍보 현장을 가다

지난 9월 22일 재일교포 윤영하(92) 할아버지는 비용과 건강 문제로 접었던 트럭 홍보 활동을 다시 펼쳤다.

7개월 만에 활동을 재개하느라 윤 할아버지는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트럭에 붙일 대형 현수막과 장비를 챙기고 나니 날이 밝았다.

오전 10시 할아버지의 손과 발이 되어주는 재일교포 태종영(68) 씨가 이날도 작업을 거들었다. 파이프로 이은 현수막을 트럭에 설치하기까지 1시간은 족히 걸렸다.

윤 할아버지를 돕는 태종영 씨가 트럭 홍보 준비를 거들었다.

 

막바지 단계에서 난관을 만났다. 야속한 하늘이 비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트럭을 적신 물기 때문에 현수막을 설치하기 어려워졌다. 편의점에서 사온 휴지와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파이프를 붙였지만 사고 위험이 따랐다.

고심 끝에 시내 도로 대신 동네 골목길을 몇 바퀴 도는 것으로 활동을 대체했다.

"나 같은 무식한 노인이 외치는 것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하늘이 비를 내려 나를 막는 것 같습니다." 윤 할아버지는 자신을 탓했다.

◇ "서울에서 핏대를 세워도 일본인은 모릅니다"

"일본의 모든 분들에게 호소합니다. 저는 무명의 재일교포 노인입니다. 일본은 죽도가 국제법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주장합니다. '한국에 무력으로 빼앗겼으니 탈환하자'고 합니다. 일본 언론은 죽도 역사를 바르게 전하지 않습니다."

애써 준비한 확성기 방송도 비 때문에 어그러졌다. 재일교포 청년회의 도움을 받아 녹음한 테이프는 아쉽게도 재생되지 못했다.



이 날도 태 씨가 트럭 운전대를 잡았다.

둘의 인연은 윤 할아버지가 초대 회장을 지낸 '죽도의 날을 다시 생각하는 모임'에서 출발한다. 지인의 권유로 참석한 이 모임에서 태 씨는 할아버지를 처음 만났다. 윤 할아버지와 24살 아래 띠동갑인 태 씨는 행동대원을 자처했다.

"노인네가 일본의 죽도의 날 제정에 분개해 이런 활동을 하는 모습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경제적인 도움은 못 되더라도 윤 회장님보다는 젊은 제가 몸으로 도와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왔죠."

큼직한 글씨로 빼곡히 적힌 독도 연표를 트럭에 둘러 돌아다니다 보면 나름대로 효과를 체감한다고 태 씨는 말한다.

"확성기로 방송을 하고 현수막을 달아 도로를 달리면 구경하는 사람이 많죠. 무관심한 듯하면서도 시선이 몰리는 걸 느낍니다. 일본에서는 접하기 힘든 내용이니까요. 이게 진실이냐고 물어보면 사실을 바로 알라고 답합니다. 현수막에 쓴 내용대로 자료가 있으니까 역사 공부를 하라고요."

빗속 거리 홍보전에 나선 독도 트럭을 바라보는 일본 시민.

 

조수석에 앉은 윤 할아버지가 맞장구를 쳤다.

"일본 사람들 귀에 들리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독도 바로 알리기 운동의 핵심입니다. 한국에서 아무리 독도 운동을 해도 일본 사회에 전달되지 않습니다. 일본에 독도 역사를 알려야 이곳 여론이 바뀝니다. 그것이 독도 분쟁을 해결하는 첫걸음입니다."

굵어진 채찍비에 트럭 홍보를 더 이상 하기 힘들어졌다.

8시간에 2만 엔. 우리나라 돈으로 약 20만 원을 주고 계획한 트럭 홍보전은 1시간을 채우지 못했다.

"연로한 분이 국가를 위해 일 하는 것을 도와드리려고 하는데 뜻대로 안 되네요. 날씨도 하나님도 안 도와주는 것 같습니다. 윤 회장님이나 내가 죄를 많이 지은 거겠지요."

윤영하 할아버지의 손발이 되어주는 태종영 씨.

 

태 씨는 힘닿는 대로 활동을 돕겠다는 생각이지만 할아버지의 건강 상태가 못내 마음에 걸린다.

윤 할아버지도 길지 않은 남은 생이 걱정거리였다.

"제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모금과 설립을 지속할 수 있도록 어떻게든 독도 간판 추진 사업을 법인화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어요. 그럼 제가 세상을 떠나도 태 선생이 이 활동을 이어줄 거라 믿습니다."

◇ "후손에게 부끄러운 조상 되고 싶지 않아"

1945년 조국이 광복을 맞았을 때 윤 할아버지는 스무 살 청년이었다. 그가 살던 광주에도 해방의 물결이 일었다. 방방곡곡 춤을 추고 장구를 치고 꽹과리를 쳤다. 청년단에 들어가 3·1 만세 운동과 독립지사 이야기로 매일 밤을 지새웠다. 그는 그때 하루아침에 애국자가 됐다고 회고했다.

그러다 일제 강점기 벼슬을 지낸 조부에게 이렇게 따져 물었다.

"할아버지는 독립 운동 안 하시고 뭣을 하셨어요?"

이제 그는 할아버지께 던졌던 이 질문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자신에게 꽂힐 것을 직감한다.

해방 직후 관제 공산당으로 몰려 쫓기듯 일본에 정착한 할아버지는 손주들이 뿌리를 잃지 않고 살아가길 바란다. 그렇기에 일본 학교에서 왜곡된 역사를 교육받아야 할 후손의 미래를 가만히 앉아 지켜볼 수는 없다고 했다.

"청년 시절 내가 할아버지에게 했던 질문을 손주가 나에게 던질 날을 떠올립니다. '할아버지는 일본에 살면서 한국을 위해 뭣을 하셨어요'라는 질문을요. 일본에서 살아가는 대한민국 후손들이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배운다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올바른 역사 교육을 받도록 하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 여러 곳 손 내밀어도 고립무원…기댈 곳은 조국 뿐

독도 바로 알리기 운동을 전개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러 사람들을 만나 때때로 뜻을 맞췄지만 진정한 협력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재일교포 단체는 "일본에 살고 있으니 독도 문제는 손 댈 필요가 없다. 국가가 알아서 할 일이지 개인이 할 사업이 아니다"라며 오히려 그를 만류했다.

전단지를 돌리러 간 한식당에선 "일본에서 살고 있는 한 독도 이야기는 안 하는 것이 좋다"는 힐난이 돌아오기 일쑤였다.

할아버지가 스스로 만든 독도 역사 알리기 단체인 '죽도의 날을 다시 생각하는 모임'에서조차 그는 불편한 존재였다.

옛 동지의 외면 만큼 힘든 게 비용 문제였다. 일본 시민단체에 후원을 요청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독도 역사를 연구하고 알리기 위해 존재하는 국내 여러 단체와 기관도 할아버지가 내민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독도 역사 간판 설립 후원금을 요청했지만 그때마다 협력할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습니다. 그런 기관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곳인지 한 번 묻고 싶습니다."

할아버지의 목표는 분명하다. 일본 정부에서 발표하는 독도 역사가 그릇됐다는 것, 한국인이 무력으로 일본 영토를 약탈한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알리는 것이다.

이들은 독도의 날 25일 한국을 다시 찾아 독도 간판 설립을 호소한다.

 

25일 독도의 날을 맞아 할아버지는 다시 한국을 찾아 서울역에서 후원을 호소한다. 지난 모금 활동은 무관심 속에 끝났지만 이번엔 다르리란 희망이 있다. 국내 계좌를 만들고 법인화를 추진하면서 현실적인 해결책에 다가서는 중이다.

앞서 6월 모국에서 한 차례 모금 활동을 벌인 할아버지의 사연이 담긴 기사엔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그를 응원하고 지지한다는 네티즌들의 댓글을 본 윤 할아버지는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태 씨는 어떻게든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며 인터넷을 배워 댓글 하나하나에 감사 답장을 달았다.

"저는 뉴스에 나올 만할 존재가 아닙니다. 칭찬을 해주시니 더욱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국민들이 보내 주신 돈 몇천 원이라도 독도 역사 알리기에 소중히 쓰겠습니다."

아흔두 살 독도 지킴이의 눈동자에 강단이 넘쳤다.
윤영하 할아버지가 25일 서울역에서 독도 간판 모금 활동을 하며 배포할 전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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