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여성폭력의 현실과 심각성을 알리고 피해자 생존·치유를 지지하는 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여성인권영화제'(Film Festival for Women's rights, 피움)가 올해로 11회를 맞았다. 올해 영화제는 '지금, 당신의 속도로'(Keep going on with your pace)라는 슬로건 아래 12개국 35편의 작품을 준비했다. 각자의 속도로 세상의 변화를 만들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위해, CBS노컷뉴스는 한국여성의전화 주최로 서울 강남구 CGV 압구정 아트하우스에서 5일 간 진행되는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현장을 전한다. [편집자 주]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 '라 차나' (사진=피움 홈페이지)
영화 '라 차나'는 혁신적인 스타일과 숨막히는 리듬으로 전 세계 관객을 사로잡았던 플라멩코 댄서 라 차나(본명 안토니아)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삼촌의 기타소리에 맞춰 춤을 추다가, 재능을 '발견' 당해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된 라 차나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스피드와 정확성이라는 '기술'을 갖춘 것은 물론이고, 예술가로서의 '감성'도 타고난 인물이다.
하지만 집시 사회에서는 남자만 '사람'으로 대접받으며 중요한 결정을 했고, 여자는 조금이라도 실수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남편은 라 차나를 예술가로 존중하지 않았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입 닥치고 복종"하길 바랐다. 결국 라 차나는 정상의 자리에 있을 때 강제로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영화는 그 이후 라 차나가 30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르기까지 굴곡진 인생을 따라간다.
24일 오후, 서울 강남구 CGV 압구정 아트하우스에서 영화 '라 차나' 피움톡톡 행사가 열렸다.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의 란희 수석 프로그래머의 진행으로, 싱어송라이터 오지은, 현대무용가 이윤정, 음악평론가 김윤하가 '여성' 예술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심장을 부여잡고 본 영화 '라 차나'우선 세 사람은 여성 예술인 '라 차나'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본 소감부터 이야기했다.
김윤하는 "너무 멋지다는 말밖에 생각이 안 났다"며 "위대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플라멩코 아티스트를 또 한 명 알게 됐다는 것만으로 좋았다"고 말했다. 오지은은 "너무 심박이 뛰어서 심장을 부여잡고 봤다"고 고백했다.
오늘이 3번째 관람이라고 발힌 이윤정은 볼 때마다 느낌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에 봤을 때는 눈물이 제 안에서 올라왔다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저로서 사는 게 무엇인지, 어떤 무용가로 살아야 할지 고민했다. 두 번째는 라 차나의 공연이 올라가기까지의 과정, '예술가'로서의 라 차나의 모습을 본 것 같다. 오늘은 그냥 그녀가 다 보였다. 그 사람이 보였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영화 '라 차나'의 한 장면 (사진='라 차나' 트레일러 캡처)
오지은은 현역을 지난 지 오래 되었음에도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던 라 차나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고 전했다.
라 차나가 젊은 남성들에게 박자를 잘 모른다고 하는 장면은 얼핏 보면 오만해 보일 수 있으나, "100%를 쏟을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에게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오지은은 "'나는 이만큼 쏟을 건데 넌 어디까지 따라올 수 있어?'라는 건데, 군더더기 없이 커다란 내공을 가졌다는 게 부럽더라"고 말했다.
하지만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결국 예술혼을 피워 낸 '여성 예술가'라는 감상은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이라는 지적도 빼놓지 않았다.
오지은은 "특히 여성 예술가에게는 '억압받으면서 피어오르는 예술혼'이라는 속 편한 소리를 하곤 한다. 하지만 남편이 때리거나 (라 차나의) 커리어를 끊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적당한 때에 치료를 받을 수도 있었고 후학을 빨리 양성해 플라멩코라는 예술 자체가 더 커질 수 있었을 것"이라며 "만일 그런 일이 없었다면 라 차나가 얼마나 더 예술적으로 풍부해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 여성 예술가들이 맞닥뜨린 현실세 사람은 각자의 영역에서 '여성'으로 존재하며 겪는 부당한 현실을 전했다. 무용가 이윤정의 경우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큰 '임금 격차'를 이야기했다.
이윤정은 "남자 무용수 수가 많지 않아서 귀하고 자연스럽게 더 대우받는 환경인 것 같다"며 "제가 가르쳤던 남학생이 졸업 후 제가 있는 무용단에 들어왔는데, 경력이 10~15년 차이나는데 임금 차이가 5배 정도 나더라. 너무 화가 나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때 스승님 무용단을 뛰쳐나온 경우가 있었다. 이런 일이 허다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출산, 육아를 하면서 많은 여성 무용수들이 가정으로 돌아가게 된다. 밖에 나와 춤추는 시간이 적어지고, 스스로 '나는 더 이상 춤을 못 추겠구나' 하는 마음을 갖는다. 그럴 때 남자 무용수는 계속 사회로 진출하고 안무가로, 평론가로서 권력을 쥐게 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오지은은 한때 고유명사처럼 쓰였던 '홍대여신'이라는 말을 예로 들어, 여성 뮤지션에게 가해지는 손쉬운 '명명'에 문제제기를 했다.
그는 "정작 여성 뮤지션들은 여신이라고 불러달라고 한 적이 없는데, ('홍대여신'이 하는 음악은) 가볍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음악이라는 시각이 있었다. 일각에서는 그런 음악이 홍대 씬을 더럽힌다고도 생각했다. 이후 (여성 뮤지션이 한) 진지한 음악에는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며 그 표현이 결국은 '멸칭'이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왼쪽부터 란희 여성인권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음악평론가 김윤하, 현대무용가 이윤정, 싱어송라이터 오지은 (사진=김수정 기자)
오지은은 여성 뮤지션은 두루 다 갖춘 '슈퍼우먼'이거나, 완벽한 '예술가'적 면모 이외의 '다른' 모습들은 제대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고도 밝혔다.
그는 "저도 결혼을 앞두고 '오지은 이제 일 떨어지겠네'라는 말을 진짜 많이 들었다"며 "결혼, 연애 발표된 여자 연예인에게는 (작품이 아니라) 결혼, 연애 후 어떻느냐는 질문이 제일 먼저 나오지만, 남자 뮤지션에게는 앨범 얘기를 한다"고 말했다.
오지은은 똑같이 '사랑 노래'를 해도 여성 뮤지션에게만 더 '지적'이 들어오는 현실을 꼬집기도 했다. 오지은은 "한 평론가가 '왜 그렇게 사랑 얘기만 하세요?'라고 한 적이 있다. 남성 뮤지션에게도 그런 질문을 할까. 창작자의 테마가 '사랑'이어서 그 얘기를 계속하는 게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 앞으로는 이런 질문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윤하는 "다행히 홍대여신이라는 말이 지금은 사어처럼 되었지만, 생각해 보면 '여성'이라는 것 하나로 모든 아티스트들의 색깔을 묶어버린 게 가장 큰 문제였다고 본다"며 "포크, 블루스, 레게 등 굉장히 다양한 장르를 하는데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신 카테고리에 묶어버려 그들의 장르와 음악을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바라보지 못하게 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저는 그 단어를 쓰지 않는 것으로 작은 반항을 했지만, 그런 단어를 쓰는 건 여성을 너무 단순화하는 것이라고 더 비판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여성 뮤지션으로 분류되는 순간 결혼, 육아 등이 가십성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미디어적 특성도 (여성에게 더) 사적이고 감성적인 것을 기대하고 질문하는 데에 있다"고 지적했다.
◇ 누군가의 고통 속에서 나온 예술을 즐겨도 될까이날 '피움톡톡' 행사에서 한 관객은 '라 차나'에 나온 것처럼 누군가가 억압받거나 괴로워하면서 탄생한 예술 작품을 즐기는 데에 고민이 생긴다고 토로했다.
이에 오지은은 "(예술가 스스로) 만든 숨구멍으로 나온 결과물을 즐기는 것은, 제 고통이 허락되는 유일한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제가 울고 싶을 때 우는 대신 어떤 노래를 썼는데, 그걸 듣고 누가 울어주면 저는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억압 속에서 피어난 결과물이 좋기 때문에) 라 차나는 불행했어야 마땅했어, 하는 태도를 지양해야 하는 것이지. 누가 어떤 과정을 거쳤든 나온 예술을 즐겨준다는 건 예술가에게 순수한 기쁨을 준다고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이윤정은 "왜 제가 저 분(라 차나)의 춤을 보고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봤다. (그의 춤은) 불행 때문에 나오는 한풀이가 아니었다. 플라멩코 발 스텝이 갖고 있는 엄청난 힘이 있다고 봤다. 이성적인 플라멩코 스텝과 (라 차나의) 슬픔, 분노가 잘 결합됐기 때문에 우리가 그걸 보며 행복하지 않았나 싶다. 엄청난 테크닉이 없는 채로, 그 안에 '불만'만 있었더라면 아마 1분도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여성성'이라는 말이 제대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오지은은 "여성성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여성성이란 말은 좀 낮게 취급된다. 마치 2부 리그처럼, 리그 바깥으로 몰아버린다. 여성성이라는 말의 복권(상실한 권세를 다시 찾음)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