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 러시아 방문의 제1목표 격인 북핵 해법은 별 소득을 거두지 못한 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원론적인 입장을 확인하는 데 그친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한-유라시아 FTA와 에너지 협력사업 추진 등 경제협력 분야에서는 어느정도 소기의 성과를 얻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특히 양국이 함께 기대감을 보인 '극동지역 개발'은 이후 남.북.러 3각 협력의 모태가 될 수 있어, 향후 북한을 경제적 이익으로 끌어들이는 주요한 유인책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文 "원유공급 중단" VS 푸틴 "막다른 골목 몰면 안돼"
문재인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진=청와대 제공/자료사진)
북한 6차 핵실험 이후 강경한 대북제재를 천명했던 문 대통령은 한.러 정상회담에서 푸틴 대통령에게 대북 원유공급 중단을 요청했다.
문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을 멈출 수 있는 지도자가 푸틴 대통령과 중국의 시진핑 주석인 만큼 북한이 핵과 미사일 도발을 멈추도록 두 지도자가 강력한 역할을 해 달라"면서 "이번에는 적어도 북에 대한 원유공급을 중단하는 것이 부득이한 만큼 러시아도 적극 협조해 달라"고 주문했다.
특별한 재정수입이 없는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싼값 혹은 무상으로 원유를 공급받는 실정이다. 때문에 원유공급 중단은 북한 경제의 아킬레스건으로 꼽힌다.
지난 7월 4일과 28일 북한이 장거리탄도미사일(IRBM)을 발사하자, 유엔 안보리는 북한의 석탄과 철, 철광석, 납, 납광석 수출을 전면 금지하는 대북 제재 결의안 2371호를 채택했지만, 원유공급 중단은 제재 조치에서 빠졌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은 "한반도 사태는 제재와 압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며 감정에 휩싸여 북한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세울 필요가 없다"고 사실상 거절의사를 밝혔다.
이어 "우리도 북한의 핵개발을 반대하고 규탄하지만 원유중단이 북한의 병원 등 민간에 대한 피해를 입힐 것으로 우려한다"고 전했다. 인도적 차원의 원유공급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운 것이다.
결국 두 정상은 "한반도 비핵화", "북핵실험 규탄" 등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하는 것에 그쳤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오늘은 협상의 장이 아니었다"면서 애써 큰 의미 부여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한.러 정상회담에서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일본 아베 신조 총리와의 한.일 정상회담에서는 나름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두 정상은 북한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와 관련해 국제사회의 비난과 압력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지금은 대화보다 제재와 압박이 더욱 강화돼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면서 "대북 원유공급 중단 등 더욱 강력한 대북 제재안이 담긴 결의안을 공동으로 추진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아베 총리는 상대적으로 우리보다 더욱 강경한 대북정책 기조인 데다, 한.일 간 과거사 문제 등으로 두 정상 간 이견이나 잡음이 나올 수도 있다는 관측이 있었던 가운데 두 정상이 한목소리를 냈다는 점은 평가된다.
아울러 몽골 할트마긴 바트톨가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은 한.미.일.중.러.몽골 등 6개국이 함께하는 다자협의체인 '동북아평화협력체제' 구상이 처음으로 드러났다는 점에서 새로운 동북아 평화체제의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 '北유인책과 경제발전'…두 마리 토끼잡는 '극동개발'
문재인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진=청와대 제공/자료사진)
러시아 순방의 최대 성과는 극동지역 개발 등 양국 간 긴밀한 경제협력 로드맵에 합의했다는 점이다.
문 대통령은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신북방정책'과 푸틴 대통령의 '신동방정책'의 공통분모로 극동지역 개발을 꼽았다.
문 대통령은 제3차 동방경제포럼에서 기조연설을 통해 "극동지역을 포함한 북방지역과의 경제협력 의지가 확고하다. 한국은 신북방정책의 비전을 갖고 있다"면서 "푸틴 대통령의 신동방정책과 맞닿아 있다. 러시아가 추진하는 극동개발을 위한 최적의 파트너가 한국"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동북아 국가들이 협력해 극동 개발을 성공시키는 일 또한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또 하나의 근원적인 해법이라고 생각한다"며 "남·북·러 3각 위해 그간 논의돼 온 야심찬 사업들이 현재 여건상 당장 실현되기는 어렵더라도, 한국과 러시아 양국이 힘을 합쳐 협력할 수 있는 사업들은 지금 바로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극동지역은 한반도 북쪽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포함한 광활한 지역으로, 문 대통령은 극동지역 개발이 향후 북한을 남.북.러 3각 협력체제에 끌어들일 수 있는 경제적 유인책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경제난에 시달리는 북한을 유도해 낮은 단계의 경제협력단계를 구축하며 평화 분위기를 만들어 보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한.러 경제공동위원회는 가스관과 전력망, 한반도종단철도(TKR), 시베리아횡단철도(TSR) 연결 등 남.북.러 3각 협력 사업에 대한 협의 채널 재개 및 공동연구 수행 등을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양국의 경제협력 방침은 구체적인 결실로 이어지기도 했다. 양국 정부는 ▲이노프롬 2018(러시아최대산업박람회) 파트너국 참여 ▲한국투자기업지원센터 구축 ▲동방경제포럼 행사 주관 관련 협력 ▲극동 금융 협력 등 모두 4개의 양해각서(MOU)에 서명했다.
아울러 수출 활로를 더욱 넓혀줄 것으로 기대되는 한-유라시아 FTA 체결 추진을 위한 공동작업반을 구성하고, 러시아는 올해 10월에 열릴 EEC(유라시아경제위원회) 5개국 총리회담에서 한-유라시아 FTA 체결을 적극 지지 표명하기로 했다.
또 경영난을 겪고 있는 국내 건설업계와 해운업계에 숨통이 트이도록 한국 기업이 러시아 인프라 사업에 참여하고, 유조선 15척 건조를 따내기도 했다.
이밖에 극동지역 인프라 사업에 우리 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20억 달러 규모의 융자플랫폼을 신설하고, 한.전 전력망 사업에 대한 사전 공동연구도 진행하기로 했다.
◇ '호랑이'로 하나된 文과 푸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 조선검 선물받은 문재인 대통령 (사진=청와대 제공)
문 대통령은 이번 순방에서 푸틴 대통령과 유대 쌓기에도 주력하는 모습이었다.
문 대통령은 동방경제포럼에서 기조연설에서 수차례 푸틴 대통령의 이름을 호명하며 친근감을 드러냈다.
특히 문 대통령의 호랑이 발언은 눈길을 끌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한국인들은 호랑이를 영물로 여기며 아주 좋아했다"면서 "푸틴 대통령도 기상이 시베리아 호랑이를 닮았다고 한다. 나의 이름 문재인의 '인'자도 호랑이를 뜻한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호랑이의 용기와 기상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면서 그런 마음으로 극동지역 발전에 나선다면 안 될 일이 없지 않겠는가"라고 호랑이를 연결고리로 자신과 푸틴 대통령을 연결지었다.
푸틴 대통령도 한.러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에게 조선시대 칼을 선물로 주는 애정의 제스처를 취했고, 회담 이후에는 문 대통령에게 산책을 제안하기도 했다.
푸틴 대통령과의 유대 쌓기는 최근 사드 배치 문제 등으로 중국과 거리가 멀어지면서 동북아의 또다른 축인 러시아와 가까워지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양국 관계가 근래 들어서 가장 좋은 단계로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이번 순방에 대한 만족감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