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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정 감독이 해독한 '브이아이피' 설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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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 인터뷰] "여성에 대한 이해 부족해…앞으로 고민 많이 할 것"

영화 '브이아이피'의 박훈정 감독.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신세계'가 뜨거웠다면 '브이아이피'는 차갑다. 인물들은 냉소적이면서 이기적이고, 끔찍한 연쇄살인사건 앞에서도 각기 나름대로의 계산법을 적용한다.

박훈정 감독의 영화에는 언제나 느와르가 숨쉬고 있다. 홍콩 느와르의 향수를 자극한 '신세계'는 다소 안전한 선택이었지만 '브이아이피'는 그렇지 않다.

시작과 끝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차디찬 색채감이 영화를 압도한다. 장면마다 뜨겁고 붉은 피가 흐르지만 그 느낌은 어쩐지 무채색에 가깝다. 일반화된 느와르의 공식을 탈피한 셈이다.

따라온 논란은 이런 색채감의 영화와 달리 불에 덴 듯 뜨겁기만 했다. 김광일 살인장면을 두고 관객들 사이에서 벌어진 여성 혐오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배우들이 혀를
내두르는 박훈정 감독의 치밀한 설계도 안에도 아마 이런 변수는 없었으리라.

이 논란까지 포함해, 그가 처음부터 '브이아이피'를 위해 그렸던 설계도를 꼼꼼히 살펴봤다. 다음은 박훈정 감독과의 일문일답.

▶ 배우들이 입을 모아서 박훈정 감독이 '뭘 많이 하려고 하지 말라'고 주문했다고 하던데, 그렇게 디렉션을 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 캐릭터가 아닌 사건 중심 영화여서 설정을 최대한 빼고, 걷어내려고 했다. 배우들이 갖고 있는 연기적인 부분 외에 특별한 설정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각 캐릭터와 잘 어울리는 배우들이었기 때문에 그냥 놀다 가시라고 했다. '신세계' 때도 이정재 씨가 그랬던 거 같은데 무언가를 하지 않는게 제일 힘들다는 이야기는 하더라. 정말 아무것도 안해도 되나 그런 불안감이 생긴다고. 그냥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필요했다.

▶ 확실히 '신세계'와 비교해보면 캐릭터 사이의 관계성 같은 요소가 건조해진 느낌이 든다. 시작과 결말만 뺀다면 차갑고 도시적인 느와르에 가까운데.

- 소위 '양념을 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많더라. '신세계'와는 정반대 느와르를 만들고 싶었다. '신세계'는 홍콩 느와르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남자들끼리의 끈적 끈적한 의리를 그렸고, 캐릭터도 약간 과정돼 있으면 '브이아이피'는 건조하고 냉정한 남자들이 나와서 목적한 바를 손에 넣기위해 이기적으로 부딪치는 이야기다.

박훈정 감독과 북한 최고위층 자제이자 사이코패스 살인마 김광일 역의 배우 이종석.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 김광일의 살인 장면을 두고 여성 혐오 논란이 일고 있다. 아무래도 남성들이 중심이 된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가 그런 방식으로 소비되는 것에 대한 논쟁이 있는 것 같다.

- 그런 반응은 충분히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 관객들이 특히 불편해 하실 거라는 것도 이해를 한다. 내가 남자라서 그런 게 있는 것 같긴 한데, 남자들 중에서도
스스로 여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 장면은 김광일 패거리의 악마성을 표현해주는 유일한 장면이다. 소녀가 느끼는 공포와 지옥도가 어느 정도 관객들에게 전달이 돼야 영화가 에너지를 갖고 끝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불편해 하는 반응을 예상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다만 생각보다 훨씬 더 그런 반응들이 강하게 왔다. 그래서 다음에는 고민이 많이 될 것 같다.

▶ 이종석이 직접 영화를 하겠다고 찾아오긴 했지만 아마 더 섬뜩한 이미지의 배우를 썼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이코패스 설정이 더 이상 독특하지 않은 점도 그렇고 영화에서 결정적인 역할임에도 뻔해질까 걱정이 됐을 것 같은데.

- 이종석이 딱이라고 생각했다. 왜 중세시대 악마를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한 그림을
보면 굉장히 아름답지 않나. 아마 고민은 나보다 (이)종석이가 더 많이 했을 거다. 무엇을 참고할지 모를 정도로 똑같은 사이코패스 캐릭터들이 너무 많다. 첫 번째로는 다 똑같아도 이종석의 '사이코패스' 연기는 아무도 못 봤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머리를 밀겠다고 하는 등 외양적 변화를 이야기하길래 그런 건 하지 말자고 했다. 관객들이 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그냥 이종석 모습 그대로 그런 미소를 지으면서 사람을 죽이고 조롱하는 게 더 열받겠다고 생각했다.

▶ 그렇다면 조금이나마 다른 사이코패스 살인마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이종석과 어떤 설정을 논의했나.

- 내가 생각한 건 그냥 딱 봉건시대 영주의 외아들이었다. 다른 사이코패스들과 태생과 환경 자체가 다른거다. 집에 있는 가축을 죽이면 혼나지만, 동네 사람을 때려 죽이면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살인이 곧 유희이고, 취미다. 완전 범죄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오락적인 행위이기 때무네 뒤처리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내가 죽였다는 걸 누가 알아도 뭘 어떻게 하겠냐는 거지. 미국에서 비호하는 이상, 서울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종석이한테 그랬다. '일반 사이코패스처럼 하지 마. 넌 신분이 다르다니까?' 이렇게.

영화 '브이아이피'를 연출한 박훈정 감독.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 장동건이 맡은 국정원 직원 박재혁 역은 영화를 열고 닫는 역할을 한다. 과거 시점과 비교해서 가장 변화가 두드러지는 인물이기도 한데 특별히 박재혁에게 그런 역할을 맡긴 이유가 있나.

- 애초에 사건의 발단이 국정원 직원 박재혁과 그 동료가 김광일의 귀순을 기획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박재혁이 영화를 열고 닫았어야 했다. 박재혁은 이 사단을 벌이고, 뒤늦은 각성을 하는 캐릭터다. 원래 책으로 쓰려다가 영화로 만든 작품이라 챕터 구성이 나눠져 있다. 인물별 챕터 4개가 더 있는데 그건 전부 들어냈고,
시나리오로 쓸 때부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한 덩어리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각 인물별 이야기가 더 있다면 스핀오프나 속편을 기대해봐도 좋은 건가. '신세계'의 속편을 기다리고 있는 팬들도 많은 것으로 안다.

- 구성과 이야기를 다 끝내 놓고 챕터별로 쓰기 시작했는데 영화로 하자는 반응이 있어서 '브이아이피'를 만든 거다. 워너브러더스에서 판권을 갖고 있으니 여기에서 하자고 하면 하는 거다. '신세계' 속편도 지난해부터 뉴(NEW) 쪽이랑 얘기 중인데 어떻게 정리될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감독한테는 판권이 없어서 속편이 나한테 달려 있는게 아니다. (웃음)

▶ 어떻게 보면 시스템에 난입한 김광일을 각자의 방식으로 처리하려는 국가 권력 기관들끼리의 충돌 사태를 그린 영화다. 자칫 잘못하면 따분한 느낌이 들 수도 있는 전개를 꽤나 긴박감 있게 풀어갔다.

- 계속 스태프들에게 승패는 김광일에게 달렸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인 것은 맞다. 물론 이종석에게는 너무 부담갖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선배들이 그렇게 만들어줄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었고. 김광일이라는 존재 하나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거대한 시스템이 오작동을 하게 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외부적인 요인 때문에 이 시스템이 무력한 거다. 현실적으로 기분이 별로이면서 분노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서 김광일이 연쇄살인을 저질렀는데 기관들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그게 알고 보니 외부에서 국내 기관들을 이용한 결과인 거니까.

▶ 차기작 계획이 궁금하다. '대호'에서도 그랬지만 어떤 영화를 하더라도 사실 '느와르' 느낌을 지우기는 어려운 것 같다.

- 흑백으로 느와르 영화를 한 번 찍어보고 싶다. 이번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건 나중에 하라고 하더라. (웃음) 고전 유럽 영화 중에서는 흑백으로 촬영된 느와르 영화들이 많다. 흑백 느와르는 또 그것만의 느낌이 있다. 대놓고 느와르 장르를 하지는 않아도 아마 (느와르적인) 그림자는 계속 가져갈 것 같다. 그 성향이 어디를 가지 않아서 작품 속에서 느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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