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양양고속도로 (사진=한국도로공사 강원지역본부)
"30년 황태를 팔아왔는데 올 여름처럼 장사가 안된 건 처음이에요. 이러다가 전부 문을 닫아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커요"황태 덕장과 황태 축제로 유명세를 이어온 강원 인제군 북면 용대 3리. 하지만 기자가 찾은 29일 현장은 명성을 무색하게 했다. 주차장은 차량을 찾아보기 어려웠고 주인들마저 자리를 비운 판매장과 음식점도 적지 않았다.
30여년간 용대 3리에서 황태 판매업을 운영해왔다는 김연숙(66) 씨는 "작년까지만해도 8월 말까지 평일에는 백만 원 정도 매출을 올렸고 주말이면 몇백만 원은 족하게 물건을 팔았다"며 "올해는 평일 8~10만 원, 잘 팔아야 40만 원이 겨우 넘는다"고 말했다.
또 다른 상인은 "요즘 같아선 죽고 싶은 심정"이라며 "앞날이 캄캄하다"고 한숨만 연방 내쉬었다.
서울에서 속초로 향하는 관광객들의 주요 길목이었던 인제 경제에 빨간불이 켜졌다. 주민들의 한숨은 커져가고 있다.
황태덕장과 황태축제로 명성을 떨쳤던 인제군 북면 용대 3리. 오가는 차량을 찾아보기 어려운 분위기다.(사진=박정민 기자)
지난 6월 30일 서울-양양 고속도로 구간 중 동홍천-양양 구간이 개통된 직후 빚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동홍천 나들목을 통해 인제를 거쳐 속초를 오가던 관광객 상당수가 서울-양양 고속도로로 방향을 바꿨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실제 고속도로 동홍천-양양 구간 개통으로 홍천에서 인제, 속초를 잇는 44번 국도 통행량은 급감하고 있다.
인제군에 따르면 지난해 7월부터 8월 둘째 주까지 서울에서 속초방면 인제 미시령터널 통행량은 48만 2천 779대를 기록했다. 반면 올해 같은 기간에는 18만 5천 934대로 60%가량 크게 줄었다.
줄어든 교통량은 관광객에 의존했던 인제 상경기의 침체로 이어지고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홍천에서 인제, 속초를 잇는 44번 국도변 간이 농산물 판매장. 주변에 오가는 차량은 물론 물건을 사기위해 멈춰서는 차량도 찾아보기 어렵다.(사진=박정민 기자)
20년간 44번 국도변에서 조각공원과 휴게소를 운영해 온 고명규(76) 씨는 "고속도로 완전 개통 이후 작년 휴가철보다 70% 정도 손님이 줄었다고 보면 된다"며 "10여 년 전 44번 국도가 편도 1차로에서 2차로로 확장되면서 타격이 한 번 있었는데 고속도로까지 생기면서 더 큰 피해가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
오가는 차량 운전자들에 의존해 영업을 하던 도로변 농산물 임시판매장들은 개점휴업 상태다.
옥수수와 단호박 등을 팔아온 양모(44) 씨는 "친정어머니를 따라 장사를 도운 지 31년이 됐는데 IMF때보다 더 힘든 것 같다"며 "정지 신호가 들어올 때 정체하는 차량 운전자들이 장사에 도움이 됐는데 이제는 차량들이 밀리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2차 피해 우려도 커지고 있다. 급감한 관광, 음식업 매출은 고용 감소로 이어져 지역주민들의 소비활동마저 위축시키고 있다는 의견이다. 남평우 인제지역구 강원도의원은 "읍내에서는 택시 영업이 예전만큼 안되고 소매업 매출이 떨어지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며 "휴가철 사정이 이 정도라면 비수기에는 문제가 더 커질 수 있다"고 전했다.
텅 빈 황태 판매장. 상인들은 지난해에는 평일에도 판매장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고 말한다.(사진=박정민 기자)
화살은 강원도와 인제군으로 향하고 있다. 용대 2리 마을회관에서 만난 조동임(72) 씨는 "동홍천에서 양양까지 고속도로를 놓는데 9년이 걸렸다"며 "모든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지만 그동안 강원도나 인제군이 예상되는 문제나 주민들의 걱정에 귀를 기울이고 대책을 마련했으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은 강원도와 인제군에 서울-양양 고속도로에서 인제 시내를 잇는 접근도로 개선과 동홍천 나들목을 인제, 속초 나들목으로 함께 명칭을 사용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일부는 44번 국도상에 설치된 미시령 터널 나들목 통과 요금을 무료 또는 인하하는 조치도 촉구하고 있다.
고속도로 종착점인 양양 지역도 명암이 교차하고 있다. 한국도로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7~8월 동해 고속도로 양양 나들목 출구 교통량은 16만여 대 수준이었지만 서울-양양 고속도로가 완전 개통한 올해 같은 기간에는 38만여 대로 두 배 이상 늘었다.
양양 낙산해변 전경.(사진=박정민 기자)
유입 차량은 늘었지만 상인들이 체감하는 경제 효과는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낙산해변 입구에서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현미(62) 씨는 "사람은 많은데 당일치기로 왔다 가는 사람이 많다"며 "서울에서 얼마 안 걸리니까. 모텔이나 식당 모두 북적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관광객들은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관광 상품에 아쉬움도 전했다. 지인들과 함께 동해안을 찾은 반옥희(55·경기 용인) 씨는 "속초에 숙소를 정했는데, 가는 길에 양양을 잠시 들렀다"며 "바다는 너무 좋은데 그 외에 양양에 가볼 만한 곳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동행한 김향영(57) 씨도 "아무리 피서철이 끝났어도 해변에 머물 수 있는 휴게 시설이 아쉽다"며 "바다를 걷고 구경하는 것 외에 관광객들을 붙잡을 수 있는 뭔가가 없어 보인다"고 덧붙였다.
양양이 속초나 강릉을 잇는 진출입로 역할에 머물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장석삼 양양지역구 강원도의원은 "다양한 볼거리와 먹을거리, 지역 이미지 개선 등을 서두르지 않는다면 서울-양양 고속도로가 주변 지역에 유리한 접근로로 전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차량 통행이 크게 줄어든 미시령 터널 나들목 전경.(사진=박정민 기자)
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자본(SOC) 확충이 경제 자립 기반이 취약한 지역을 위협하는 요소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한 철저한 사전 준비도 요구됐다.
나철성 강원평화경제연구소장은 "대규모 개발에 앞서 환경영향평가가 있는 것처럼 광역, 기초 자치단체 차원의 SOC 추진에 따른 경제 영향평가가 고민돼야 한다"며 "무엇보다 도로, 철도 사업은 정치적 판단이 아닌 지역 전체의 이익 여부를 고려해 시작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동 강원연구원 박사는 "관광 패턴이 분명한 목적을 갖고 향유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며 "도로, 철도 개통에 좌우되는 경제 피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연 자원 의존도를 탈피해 지역 특성을 반영한 레저형, 체험형 관광산업 모델을 정착시켜나가야 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