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
적폐(積弊)는 오랫동안 쌓인 폐단을 뜻한다. 몇년 전만해도 '적폐'는 잘 쓰이지 않는 단어였다. 두꺼운 국어사전 속에서 잠자고 있던 적폐를 세상에 끌어낸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박 전 대통령은 스스로 적폐의 몸통이 돼 국민들로부터 탄핵당했고, 촛불민심에 힘입어 정권을 잡은 문재인 정부가 보수정부 9년간 쌓인 적폐를 씻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여소야대의 국면에서 각종 입법 과제들이 국회의 문턱을 넘기 어려워 근본적인 적폐청산에 험로가 예상된다.
◇ 국정원 중심으로 속도내는 적폐청산, 대통령이 직접 힘 실어적폐청산은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강조해온 첫번째 가치이자, 문 정부 탄생의 배경이기도 하다. 정부는 5개년 계획과 국정과제에도 적폐청산을 최상위로 올렸다. 정부의 강한 의지에 따라 적폐청산 작업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우선, 국정원이 적폐청산 TF를 꾸려 환부를 도려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TF활동 몇주만에 이명박 정부 말에 운영되던 댓글부대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검찰 수사가 진행될 예정이며, '논두렁 시계' 등 노무현 전 대통령의 수사 일화, 채동욱 전 검찰총장 뒷조사 의혹 등 13건의 폭발력있는 사안들에 대한 조사도 이어진다.
검찰은 수사로서 적폐청산에 보조를 맞추고 있다. 문 대통령이 직접 주문한 "환골탈태 수준의 국방개혁"의 일환으로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등 방산 비리 수사가 진행중이다. 국정원 TF에서 넘어오는 댓글부대 등 각종 의혹도 검찰 수사로 이어질 전망이다.
정부에서는 '적폐청산특별위원회'가 따로 설치되지 않은 대신 각 부처에서 적폐청산을 위한 과제를 수행하게 된다.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율사 출신 박범계 의원을 중심으로 '적폐청산위원회'를 구성해 각 사안을 모니터링하고 이슈화할 예정이다. 문 대통령이 최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과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나 공식 사과하고 후속조치를 약속한 것도 적폐청산에 힘을 실어주는 일환이다.
◇ 적폐청산 입법에는 험로 예상, 국민의당 바른정당 협상력 발휘가 관건이처럼 각 부처에서 속도를 내고 있고 일부 성과도 있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진정한 적폐청산은 특정인 몇명에 대한 수사와 법적 처벌에 그치지 않고 보다 근본적인 제도 개혁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검찰의 경우 수사를 맡길 것이 아니라 검찰 조직에 쌓인 적폐를 개혁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일고 있다.
검사 출신의 법사위 소속 금태섭 의원은 "검찰을 이용해 빠르고 쉽게 적폐청산을 위한 수사를 진행할 수 있지만, 이는 오히려 내부 개혁이 덜 된 검찰의 힘을 대폭 키워줄 수 있다"며 "검찰 내부 개혁이 선행돼야 과거 정권에서 반복돼온 권력기관을 이용한 적폐 양산을 막을 수 있다"고 충고했다.
국정원도 마찬가지로 과거 사례에 대한 내부 조사와 진상규명도 중요하지만 현실정치 개입을 막는 보다 근본적인 입법 조치가 필요하다.
이에 여당은 앞다퉈 '적폐청산 법안'들을 내놓고 있다. 민주당 진선미 의원은 국정원의 범죄수사권과 국내 정보 수집 업무 폐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국가정보원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정세균 국회의장과 여야 4당 원내대표. 좌측부터 국민의당 김동철,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정 의장, 자유한국당 정우택, 바른정당 주호영 원내대표 (사진=윤창원 기자)
검찰 개혁을 위해 금태섭 의원은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통해 검찰은 원칙적으로 경찰이 송치한 사건에 대한 보충적인 수사만을 하도록 하는 내용의 검찰 수사권 견제 방안을 내놨고, 표창원 의원도 구속영장을 사법경찰관이 집행하도록 하는 내용의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적폐청산의 완성으로 법개정이 필요하지만 국회의 여야 권력 지도상 상황은 녹록치 않다.
자유한국당은 여소야대 국면에서 노골적으로 당내 '국정원 개악저지 특위'까지 꾸려 반기를 들고 있다. 특히, 한국당은 국정원 적폐청산 TF를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 대한 정치보복TF"라고 규정하며 관련된 법개정을 저지하겠다고 공언한 상태이다.
이에 민주당은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보수야당을 압박하고 국민의당, 바른정당 등 적폐청산에 일부 동조하고 있는 각 당의 상황에 맞춰 협상력을 발휘하겠다고 밝혔다.
박범계 의원은 "국회 상황이 결코 쉽지 않지만 야당별로 입장이 각기 다르고 국민의당, 바른정당과는 합의점을 찾을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면서 "여론 작업을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9월 국회에서부터 본격적인 협상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