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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튀기는 조선인들 뒤에 숨은 '일제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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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불편한 진실 ②] 조선인을 증오했던 조선인…'불신' 트라우마 비극

광복 72주년을 맞이한 한국 사회에서 '친일'은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입니다. 지금까지도 과거사 청산의 뚜렷한 열매를 얻지 못한 데 따른 비극이겠죠. 친일의 온전한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탓에 우리네 과거사 인식 역시 비좁은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진단이 나옵니다. 모든 해법은 문제를 직시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CBS노컷뉴스가 친일에 관한 불편한 진실을 전합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친일파' 지옥도…헛된 꿈을 꾼 마름들
② 피튀기는 조선인들 뒤에 숨은 '일제 민낯'
③ '미완의 청산'이 낳고 기른 '헬조선'
<끝>

서울 종로구 옛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자리한 평화의 소녀상이 비에 젖어 있다. (사진=자료사진/노컷뉴스)

 

"일제시대 식민지 조선에 온 일본의 지배층은 항상 외국의 시선을 의식했다. 미국·영국·프랑스 같은 서양 제국주의 열강과 비교되는 것에 예민했기 때문에 '문명의 언어'를 구사하려 애썼다.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 교육을 받은 일본인들이 조선에 고위직으로 왔는데, 대민업무에 종사하는 일본인이나 조선인에 비해 포악하지 않다는 인상을 준 것이 사실이다. 월급 잘 주고, 새로운 농업·어업 기술을 가르쳐 주고, 공장에 취직시켜 준 일본인들에게 좋은 감정을 지닌 조선인들도 있었다."

유선영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의 이야기다. 그는 "이와 관련한 연구 보고서도 있지만, 우리는 일제시대를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려는 측면이 강해 이러한 사실을 그리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며 "당대 조선 사람들이, 교육 수준이 낮은 대다수 일본인들과 완장 찬 친일 조선인들의 폭악성에 분노하던 상황에서 가능했던 일반적이지 않은 현상"이라고 전했다.

유 교수는 "일제와 식민지 조선 사이 중간 브로커로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개념 없이 정말 잔혹하게 동족을 억압했던, 쓸데없는 권위의식에 젖은 친일 조선인들이 분명히 있었다"며 말을 이었다.

"식민 지배가 이뤄지는 곳에서는 대민업무를 맡는 하급 관리·계층이 동족 안에 항상 존재했다. 그런데 조선처럼 예전부터 반일 정서가 높았던 민족을 통치하려면 말단들이 훨씬 더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무단에 가까운 초법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일을 주로 조선인들이 했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더욱 미워하고 증오하는 정서가 있었다. 결국 일제는 자신들에게 향해야 할 증오를 조선인들에게 전가한 셈이다."

조선과 달리, 일제가 대만을 통치할 때 유화정책을 쓴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유 교수의 설명이다.

"대만인들은 일본의 지배를 그리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제는 대만인들이 고위직에도 올라갈 수 있도록 한다거나, 여러 복지시설을 쓸 수 있도록 하면서 포용정책을 썼다. 대만인들이 조금 더 자치적으로,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여지를 넓혀준 것이다. 반면 조선의 경우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굉장히 컸고, 문화·문명적으로 일본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조선인 하급관리가 가장 많았던 데가 헌병과 경찰인데, 3·1운동 이전인 1910년대까지는 이 영역에 조선인을 쓰지 않았던 이유다."

이렇듯 반일 감정이 높은 조선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 일제가 끌어다 쓴 개념이 '민도'(民度)였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차별의 근거를 만드는 데 있다"며 "종족·인종 차별에 근거한 우생학을 조선에 노골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민도'를 활용했다"고 말했다.

"일제시대에 천황이 조선을 지배하면서도 직접 법으로 통치하지 않고 자기 대권을 조선총독에게 위임하지 않았나. 이때 조선에서 일본 법을 시행하지 않는 이유로, 일제는 '조선의 민도가 낮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차별의 근거를 민도에, 그러니까 자본주의 문명이 낮다는 데 둔 것이다."

◇ 일본인과 조선인 차별 근거 '민도'…잔인한 폭력은 친일파 몫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전경(사진=국가기록원 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이러한 맥락 안에서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 대해 사실상 직접지배정책을 썼다는 것이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의 설명이다.

박 교수는 "일본의 조선 지배 정책에서 특이점은 중간 관리자를 둬 조선 사람들을 관리하도록 한 게 오히려 드물다는 것"이라며 "영국이 인도를, 프랑스가 베트남을 통치할 때 활용한 간접지배정책과는 차이를 보인다"고 말했다.

"일본은 자국에서 오히려 공공기관에 종사할 관리들을 대거 데려와 조선을 직접 지배하는 방식을 택했다. 일제 말기까지 조선에 와 있던 일본인은 70만 명이 조금 넘는데, 교사·경찰 등을 다 합쳐 직업을 지닌 일본인 가운데 35% 정도가 그러한 통치인력이었다. 원래부터 조선 총독으로 군부 인사들이 왔기 때문에 조선에 대한 지배 방식은 (말기까지) 큰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일본의 식민지 조선 지배 방식에서 볼 수 있는 한 특징이다."

그는 "일제가 친일단체를 육성하기는 했지만, 조선 사람들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 데는 영향을 크게 미치지 못했다"며 "오히려 (일제에 협력한 조선인들이) 친일파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고 전했다.

"사실 일본은 일제 말기까지도 (조선에서) 문화적인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했다. 식민통치에서 헤게모니는 원주민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뜻한다. 일본은 조선에서 이를 달성하지 못한 것이다. 일제시대 책임있는 자리에는 조선인들이 거의 없었다. 그 밑에서 실무를 봤던 사람들이 대다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해방 뒤) 미군정의 비호 아래 큰 권한을 갖는 자리에 올라서게 되니까 사회적 불만이 커졌다. 일제 하에서 실무 인력으로서 일제에 충성을 다한 사람들이 실권을 잡았으니 반발이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인다. 상황이 이러하니 여전히 친일 잔재가 청산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친일파로 인해 조선인들 사이 갈등과 반목은 굉장히 심했다. 유선영 성공회대 교수는 "1920년대 초 만주나 중국, 러시아에서 활동했던 의열단 등 무장단체들은 조선인을 착취한 조선인을 많이 암살했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당대 조선인들은 자기를 때린 일본인보다, 중간에서 말리지 않거나 더 앞장서서 억압했던 조선인들에 대한 배신감과 증오감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가정폭력에서도 보면 때린 아버지보다 말리지 않은 어머니를 더 미워하는 피해자가 많은 것과 비슷한 이치다. 기본적으로 조선에서는 일제에 대한 저항감을 확실히 갖고 있었고, 이와 더불어 전면에 나서서 자기들을 괴롭히는 같은 민족을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감정이 있었던 것이다."

유 교수는 일제 식민지를 경험한 조선인들의 가장 큰 트라우마로 '불신'을 꼽았다.

"일제는 그 자체로 불신과 증오의 대상이라지만, 같은 조선인들 사이에서도 누가 언제 자기를 고발할지 모른다는 불신이 팽배했다. 순사가 아니어도 이웃의 누군가 자기를 고발할 수 있는, 사찰할 수 있는 환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가족·가문 외의 다른 타자는 같은 조선인이더라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정서가 깊이 뿌리내렸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특히나 일제에 나라를 넘겨준 권력층과 그 지배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굉장히 강했다"며 "그러한 체제는 해방 뒤에도 청산되지 못한 채 그대로 유지돼 왔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권력과 엘리트에 대한 불신이 크다"고 진단했다.

◇ 용기가 필요했던 '친일파' 연구…"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영화 '밀정' 스틸컷(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지배했던 몹시도 야만적인 통치 방식을 꼬집는 목소리도 있다.

김귀옥 한성대 사회학과 교수는 "'식민지 사람들을 어떻게 포섭하는가'는 18세기 제국주의 통치의 중요한 어젠다였다. 식민지 원주민들을 '제2국민화' '열등국민화' 시키는 것은 공통된 통치방식으로 볼 수 있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당대 영국이나 프랑스는 이론적으로라도, 식민주의를 일종의 '문명의 은총'처럼 선전하고 인식시켰다. 그들 제도의 품으로 들어와 그들이 원하는 국민·식민이 된다면 민주주의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1789년 대혁명 이후 식민지를 대상으로 대중교육과 민주주의 의회를 준다는 문명화 전략을 취했다. 그런데 일본의 식민지 통치 전략은 몹시 야만적이었다."

김 교수는 "여타 제국주의 국가와 달리 일본은 민주주의로 포장한 제국주의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조선을 지배했다. 형식적인 차원에서도 (인권·민주주의 등에 대한 인식이) 크게 떨어졌던 것"이라며 "조선 총독부는 한 번도 식민지 의회를 주려 한 적이 없을 뿐더러, 3·1운동 전까지 대학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등 식민지 관리 모델의 터전 자체를 스스로 제거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일제의 야만적인 식민지 통치 방식을 고려할 때 "당대 창씨개명을 한 모든 조선인을 친일파로 보면 역사에서 어떠한 비판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김 교수의 당부다.

"친일을 논할 때 '50보 100보'라는 개념은 모든 토론의 여지를 무력화시킨다. 자식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창씨개명을 한 가난한 아버지와, 더 많은 권력을 취하기 위해 창씨개명을 한 권력자는 구분해야 한다는 말이다. 일제에 부역하면서 더 많은 권력을 누리고 이를 통해 동족을 가렴주구한 '마름 정치'의 수혜자는 분명히 비난받아야 한다. 다만, 군사 독재시대에 국민학교에 다니면서 반공교육을 받은 모든 사람을 독재 협력자로 부를 수 없듯이, '일제시대를 산 사람은 모두 친일 부역자'라는 인식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친일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이분법적인 사고에 머무는 이유는 무엇일까. 심용환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은 "그간 '친일'이라는 말조차 쉽게 꺼내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친일파를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라며 "친일에 대한 광범위한 질적 연구가 안 되고 있기 때문에, 대중 소비 방식에서는 단순히 '친일파는 나쁜 놈'이라는 감정이 섞임으로써, 정작 '친일 메커니즘'을 다룬 연구는 퍼져나가지 못해 왔다"고 설명했다.

"친일 연구에서는 민족문제연구소를 중심으로 만들어 온 '친일인명사전' 이상의 성과는 없다고 봐야 한다. 사실 우리는 일제시대와 징용, 일본군 '위안부' 등에 대해 잘 모른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일어난 우리네 문화의 문제도 잘 모른다고 본다.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학계에서부터 분발해, 친일파를 단죄하는 차원을 넘어선 연구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심 소장은 "일제와 친일에 대한 이분법적 접근법이 지금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연대를 가로막고 있는 측면이 굉장히 강하다고 본다"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몇몇 학자들의 연구만으로는 안 된다.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노력이 수반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법이 바뀐다고 곧바로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일제시대에도 그럴싸한 법과 명분이 있었고 박정희 군사독재시대에도 근로기준법이 있었지만, 모두 지켜지지 않았다. 더 나은 현실을 위해서는 법과 제도의 개선과 더불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지닌 윤리·도덕 수준에 대한 냉철한 진단과 공유가 요구된다. 일제시대와 독재시대는 이러한 시민의 덕성을 기르는 구조가 아니라, 오히려 막아내는 시스템이 강하게 작동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이러한 부정적인 문화가 여전히 뿌리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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