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2주년을 맞이한 한국 사회에서 '친일'은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입니다. 지금까지도 과거사 청산의 뚜렷한 열매를 얻지 못한 데 따른 비극이겠죠. 친일의 온전한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탓에 우리네 과거사 인식 역시 비좁은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진단이 나옵니다. 모든 해법은 문제를 직시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CBS노컷뉴스가 친일에 관한 불편한 진실을 전합니다. [편집자 주][글 싣는 순서]
① '친일파' 지옥도…헛된 꿈을 꾼 마름들② 피튀기는 조선인들 뒤에 숨은 '일제 민낯'③ '미완의 청산'이 낳고 기른 '헬조선'<끝>
영화 '군함도' 스틸컷(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친일파는 헛된 꿈을 키웠다. 일제가 조선을 통치하는 데 협력한 그들은 왜 '마름'의 길을 택했을까.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자국민이 자국민을 관리하게끔 하는 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형적인 통치술로 볼 수 있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아무래도 (통치의 효율성 면에서) 비용이 싸게 드니까, 적절하게 선만 안 넘으면 허용해 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회가 민주화 되면 그런 것들도 줄어들게 돼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 그것(하급 관리자)도 권력이니까 강화될 것이다. 예를 들어 지주가 가장 살기 좋았던 때가 일제시대라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조선 후기에도 양반으로서 지주들이 권력을 지녔는데, 일제는 그런 식으로 지주를 굉장히 잘 대접했다는 것이다. 당시 지주를 대변하던 마름들 역시 실제적 권력을 행사했다. 이를 크게 보면, 일제시대에는 일종의 민족분열정책이 잘 활용되면서 계급적인 지배가 훨씬 강화됐다고 볼 수 있다."
김 연구원은 "일제가 친일파로 육성·홍보했던 이들은 주로 조선 사회 지배계층, 그러니까 거물급이었다. 소위 말단에서 친일을 한 경우는 자생적인 측면이 강했다. 작은 권력이나마 누리려는 사람들이 있었을 테니까"라며 "(일제가) 의도적으로 (친일파 육성을) 기획하지 않았더라도, 식민지 구조는 그 자체로 폭력과 차별에 기초한 사회다. 그 차별이라는 것이 일차적으로 '민족' 차별, 이차적으로 '계급' '성' 차별 등이 중층적으로 들어가는, 구조 자체가 이를 생산해내는 기능을 한다"고 설명했다.
일제에 협력한 조선인들은 먼저 자신부터 설득하는 합리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유선영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는 "어느 제국주의 체제에서나 식민지를 운영할 때, 중간 관리자까지는 아니어도 대민업무에 종사해야 할 하급관리는 해당 식민지 민족의 일부를 차출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라며 "식민지에서 소수의 정복자가 다수의 원주민을 지배해야 했기 때문에 이 둘을 연결시키는 중간 브로커 집단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전했다.
"이러한 매판 하급관리를 아프리카에서는 '서벌턴'(subaltern)이라 불렀다. 인도네시아 등 화교가 많이 퍼져 있는 동남아시아에서는 중국인들을 이러한 매개로 썼다. 중국인이 상업, 회계 등을 잘 깨우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경우, 당대 일제에 협력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민족을 '배반했다'는 생각보다 '문명화했다'는 것으로 스스로의 행위를 합리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화'를 '문명화'와 동일하게 쓰는 정서가 한편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유 교수는 "(친일파는) 계급 상승에 대한 욕망이 컸다. 양반 중심의 신분제 아래에서 소작농 등으로 살았던 계층이 전체 인구의 80, 90%였으니, (친일을) 전복의 기회로 생각했고, 일제에 협력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이익이 무지 많았을 것이라고 본 것"이라며 "(말단 영역에서의 친일을 통해) 일단 생활을 보존하고, 뇌물을 받는 등 사소한 권력을 챙길 수 있었을 것이다.생존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기존 체제에서 억압 받았던 계층이 이런 식의 신분상승을 위한 방편으로 일제에 부역했을 여지도 크다"고 봤다.
◇ 친일에 뿌리내린 '성공주의' '기회주의'…"자기 욕망 실현 과정서 타인 억압"
지난 12일 오후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열린 '강제징용 노동자상 건립 제막식'에 참석한 강제징용 피해자 김한수 할아버지가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노컷뉴스)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일제의 이러한 분열지배정책은 시기별로 다른 특징을 보였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조선의 경우 (1919년) 3·1운동 이후 문화통치시대에 분열지배정책이 본격화 된다고 볼 수 있다"며 "그 이전에는 무조건 강압적인 정책이었다. 1910년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다음에는 모든 조선인 단체를 해산시켰다"고 전했다.
이어 "3·1운동 이후에는 각 분야마다 친일단체를 육성했다"며 "유생들 안에서도, 자본가들 안에서도, 지식인들 안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친일단체를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3·1운동 이후 1920년대 문화통치시대와 1930년대 중반 이후 동원체제에서 등장하는 친일파의 성격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심용환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가 3·1운동 이후 문화통치를 본격화하면서 친일파 육성을 지시했다는 문서가 있다. 이에 적응했던 사람들이 이광수로 대표되는 자치론자들이었는데, 1930년대 중반 이후 동원체제로 넘어가면 상황이 달라진다"며 말을 이었다.
"동원체제 하에서는 소위 마름형 친일파가 많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는 일제가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명분을 통해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시기였기 때문에 식민지 관리에 통제력이 있었다. 이에 비해 1930, 40년대 군부 우파가 권력을 잡고 전쟁을 계속 수행해 나가고, 필연적으로 강제징용이 이뤄지면서 상황 자체가 바뀐다. 생존이라는 문제 앞에서 모든 논리가 오그라든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등의 강제징용을 보면 소방서·면사무소 직원들까지 모조리 동원됐다. 떠밀려서 친일 행위를 하는 사람과 자기 생존을 위해 (동족을) 짓밟고 올라가 친일을 하는 사람들이 공존했던 것이다. 일제 말 친일파는 그렇게 양적으로 확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보다 자세한 것은 연구를 통해 규명돼야 할 문제다."
심 소장은 친일파를 두고 "성공주의자" "기회주의자"라는 표현을 쓰면서 아래와 같이 부연했다.
"친일파는 조선인을 억압하기 위해 그 길을 택하기 보다는, 자신의 성공을 최우선에 두고 적당하게 자기 민족을 무시하고 독립운동을 찍어누르던 사람들이다. 본인의 성공과 영달을 위해 체제에 순응했던 독재 부역자가 탄생하는 메커니즘과 똑같다. 모든 것이 자기 성공을 위한 수단이었던 셈이다. 개인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과정 안에서 타인에 대한 억압도 이뤄진 것이다."
그는 "기회주의는 속성상 싸우면서 모순과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개인·가족의 영달을 위해 성공하고 적당히 눈감고 필요하면 피까지 묻히라는 자기 합리화"라며 "그 길을 연 것이 (권력 유지를 위해 친일파를 중용한) 이승만이었고, 기회주의적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보여 준 인물이 김구였다. 이후 현대사에서도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기회주의가 문화로 계승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 '일제와 거래 가능하다' 착각…권력 눈치만 살피는 손발로 전락
지난 3월 1일 제98주년 삼일절을 맞아, 당시 유력 대선주자로 꼽히던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열린 기념행사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노컷뉴스)
친일파는 신분상승과 같은, 자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일제에 부역했던 이들이다. 그러나 일제 입장에서 친일파는 철저하게 수단으로만 활용되는 존재에 머물렀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일제는 사실상 식민지 조선을 직접통치했다. 중간 관리자도 대부분 일본인들로 채웠다"며 "물론 각 지역 군수는 전부 조선인이었지만, 실제 권력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가끔 조선인 도지사가 있었는데, 이 경우도 일본인이 견제했기 때문에 실권을 가졌던 경우는 없다고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제는 조선을 일본으로 완전히 편입시키기 위해 이러한 지배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당시 일본 인구가 팽창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 많이 남아 돌았으니, 일본인들에게 일자리를 준다는 차원이 컸다. (조선 통치에서도) 철저히 일본인 중심적인 면이 컸다."
김귀옥 한성대 사회학과 교수는 "일제시대에서 조선인들은 철저하게 하등·열등 국민으로 자리매김 됨으로써 정치적인 모든 결정권에서 배제됐다"며 말을 이었다.
"친일 부역자 문제, 이를 테면 협력자 문제를 이야기할 때, 이 '협력'이라는 것은 일본이 조선에 대해 어떠한 파트너십을 지녔느냐가 관건이다. 영국이나 프랑스의 제국주의 전략을 보면, 식민지에 최소한의 정치력을 주는 방식이었다. 이 정치력은 결국 정책 결정을 위한 아이디어, 제국과 타협할 여지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이러한 여지는 아예 없었다"
"일제는 조선에서 최소한의 자치권·자주권마저 박탈한 채 앞잡이만 만들어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설명이다.
"예를 들어 조선인 강제노동자, 일본군 '위안부'는 법으로 내려온 총동원령에 따라 끌려갔다. 이 과정을 조선총독부는 완전히 군대식으로 진행했다. 총독부가 령을 만들어 일본의회의 승인을 얻어내 집행하는 시스템이었다. 여기에 조선인들이 의사 결정권을 갖고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그는 "조선인 스스로 부역자는 될 수 있었지만, 부역자 스스로 조선인들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아이디어조차 낼 수 없는, 그야말로 최고 지도부인 총독부의 눈치만 살피는 손발이 된 것"이라며 "군국주의적인 '상명하복'이라는 야만을 학습한 식민지 말단 부역자들이 이승만 정권에서 재등장하고 군사독재 정권에서 그 야만을 강화하면서, 이러한 사회문화 구조가 (한국 사회에) 뿌리내렸다"고 역설했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일제의 식민지 조선 지배에서 부역자를 강조하다 보면, 그 마름들에게 굉장한 자율성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며 "사실 친일이라는 것의 자율성은 굉장히 제한된 자율성이다. 일부 친일파는 그 제한된 자율성을 갖고 마치 뭔가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바람에 최린처럼 (조선이) 자치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꼬집었다.
이어 "하지만 일본은 단 한 번도 그런 것을 허용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소위 '(일제와) 거래가 가능하다'고 착각했던 셈이다. 일상사에서는 작은 거래들이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식민지라는 전체 구조에서는 불가능한 거래를 상정한 것"이라며 "그것을 착각하면 넘어가 버리는 것이다. 결국 이뤄질 수 없는 꿈을 꾼 것"이라고 강조했다.
CBS노컷뉴스 이진욱 기자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