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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힌츠페터 아내가 밝힌 #남편 #광주 #송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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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위르겐 힌츠페터의 아내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드. (사진=쇼박스 제공)

 

1980년 5월 18일. 독일 ARD 방송국의 카메라 기자인 위르겐 힌츠페터는 일본 뉴스를 보다가 한국 광주에서 시민군과 계엄군이 충돌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곳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음 날인 19일 위르겐 힌츠페터는 바로 광주로 향했다. 검문소에서 저지당하자 그는 외국 회사 직원으로 위장해 군인들을 속이고 광주 진입에 성공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끔찍한 비극과 참상은 그의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겨 결국 전세계에 알려졌다.

영화 '택시운전사'는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와 동행한 택시운전사 김사복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영화 개봉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지난해 겨울, '푸른 눈의 목격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신체 일부는 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됐다. 생전에 광주를 그리워하고, 광주에 묻히고 싶어했던 그의 유언 때문이었다.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드 여사는 65세에 위르겐 힌츠페터와 만나, 인생의 동반자로 말년을 함께했다. 의사였던 그는 누구보다 남편 가까이에서 광주 이야기를 들었다. 단아한 모시옷을 입고 한국에 온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드 여사는 남편의 이야기를 지금까지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 실제 위르겐 힌츠페터 씨가 만났던 택시운전사 김사복 씨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하다.

- 자주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낙천적인 친구 녀석'이라는 표현을 썼다. 남편은
그가 무엇을 하며 살아 있는지 궁금해 했고, 다시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단순히 기사와 손님 관계가 아니라 젊은이들이 시위하면서 피 흘리고 쓰러지는 장면을 보면서 내가 너를 끝까지 도와줘야 한다는 마음으로 자신을 도와줬던 기억을 갖고 있었다. 남편(위르겐 힌츠페터)은 민주화 운동에 가치를 부여해서 광주에 갔다. 김사복 씨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 민주화 운동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도와주지 않았을까 그런 확신을 했다고 들었다.

▶ 처음 위르겐 힌츠페터 씨와 광주에 갔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궁금하다.

- 남편과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한 것은 2002년 말이었는데 만나자 마자 광주 이야기를 했다. 기자 생활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하나의 사건이고, 가슴 속에 있는 이야기였다. 누구를 만나도 남편은 그랬다. 젊은이들이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독재자에 의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믿을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광주에 있는 5.18 민주묘지에 가서 헌화를 하는데 남편은 감정에 북받쳐서 말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광주에 오면 당시가 되살아나고, 목격자가 된 이후로 그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옆에서 보면서 안타까웠다.

▶ 위르겐 힌츠페터 씨가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화하도록 허락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이었나.

- 지금 한국의 어린 세대들이 당시 젊은이들이 얼마나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쳐가면서 투쟁했는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학교에서 배우는 건 현장감이 없으니까 영화로 만들어지는 게 교육적인 차원에서 좋다고 봤다. 그렇게 되면 다음 세대들이 이러한 역사를 잊어버리지 않고 오래 기억하지 않을까 했던 것 같다. 지금은 한국에 이 영화를 보여줄 수 있는 상황이 돼서 다행이다.

▶ 실제 위르겐 힌츠페터 씨가 어떤 기자,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씀 부탁드린다.

- 굉장히 정직한 사람이었다. 남을 나쁘게 이야기하지 않고, 늘 부지런하고 조용했으며 집중력이 강했다. 옳다고 생각하는 건 끝까지 하는 성격이었다. 당시 광주에 갔던 것도 상사가 시킨 업무가 아니라 본인이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갔던 것이다. 그 확신이 굉장히 강했다고 한다.

영화 '택시운전사' 스킬컷. (사진=쇼박스 제공)

 

▶ 한국 내부에서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여전히 '북한 세력에 의한 폭동'으로 왜곡해 보는 시선도 많다. 이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 폭동이라고 말하는 일부 사람도 있겠지만 목격자인 내 남편의 눈으로 본 항쟁은 심장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울분이었다. 군대가 들어와서 사람들을 폭행하고 죽였다. 권력의 힘으로 항쟁을 짓누르려고 하는 게 보였고, 시민들은 한없이 저항하며 죽어야 했다. 그들은 독재에 지친 나머지 속에서 나오는 울분으로, 진정한 민주주의를 갈구하면서 거리로 뛰쳐나왔다. 남편이 목숨을 걸고 그 광경을 촬영한 것도 이 진실을 보여주지 않으면 왜곡될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영화 속에는 택시운전사들의 추격전 등 탈출 상황에 허구가 가미돼 있는데 실제 위르겐 힌츠페터 씨는 어떻게 광주를 빠져 나왔나.

- 이것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들었던 이야기는 당시 외신
기자들을 위한 영문 신문이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 외신 기자들은 자유롭게 한국에서 출국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고, 그걸 오려서 항상 몸에 지니고 있었다. 5.18 당시 신문에서 발췌한 건 아니고 그 전에 혹시나하는 상황에 대비해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 위르겐 힌츠페터 씨의 실화를 녹여낸 영화 '택시운전사'를 관람한 소감이 궁금하다. 만약 그가 지금 이 영화를 봤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젊은이들의 열정을 섬세하게 보여줬고, 택시운전사 김만섭 역을 맡은 송강호 배우가 감정 연기를 너무 환상적으로 했다. 아마 남편은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될 수 있는 상황이라 좋아했을 것 같다. 실제 목격자이기 때문에 옛날 아팠던 기억이 되살아나서 힘들어했을 수도 있지만 아마 찬사를 보냈을 것이다. 그가 광주 묘역에 묻히고 싶다고 이야기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희생당한 청년들의 끈끈한 결속력과 민주화의 갈망을 이해했기 때문에 죽어서도 함께 하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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