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민으로 구성된 자원봉사단이 12년만의 은혜를 갚기 위해 지난 26일 청주시를 찾았다. (사진=김민성 기자)
"평생 이 세상은 나 혼자 힘으로만 살아가는 줄로 알았어요. 멀리 전주에서 와준 분들 덕택에 우리 나무들이 다 살아났어요. 완전히 포기하고 있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지난 26일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의 한 마을.
정원수(庭園樹)인 주목 천여 그루를 14년째 키우고 있는 곽성숙(65·여) 씨는 요 며칠 사는 맛을 잃었다. 얼마 전 내린 폭우로 하천이 범람해 주목밭이 쑥대밭이 되면서다. 작게는 1m 50cm, 크게는 2m 30cm까지 자란 곽 씨의 주목들은 물속에 완전히 잠겨버렸다.
물이 빠지자 처참한 모습이 드러났다. 무릎 높이 정도로 쌓인 토사 때문에 2미터를 훌쩍 넘던 나무들의 키는 성인 남성들의 가슴에 닿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한 주목(朱木) 나뭇가지에 진흙과 비닐, 지푸라기 등이 어지럽게 엉겨붙어 있다. 일일이 손으로 떼어내야 한다. 이때 먼지가 심하게 날려 봉사자들이 애를 먹었다. (사진=김민성 기자)
그뿐만 아니라 어디서 떠내려 왔는지도 모를 지푸라기와 비닐 조각들이 마치 누에고치처럼 나뭇가지를 칭칭 감고 있었다. 진흙덩어리들도 잔뜩 엉겨 붙은 탓에 곽 씨는 수습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정말 다 죽었구나' 생각하고 모든 걸 포기했던 그때, 생각지도 못한 도움의 손길이 찾아왔다. 전주시자원봉사센터가 대학생 등 자원봉사자 60여 명을 이끌고 곽 씨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날 전주시민들로 구성된 자원봉사단의 청주 방문은 2005년 수해복구를 지원해 준 청주시민들에게 12년만에 은혜를 갚기 위해 마련됐다. 일주일 전인 지난 19일에 이어 올해 두 번째다.
이들은 오전 10시쯤 짐을 풀기가 무섭게 '작업'에 돌입했다. 지푸라기와 비닐을 일일이 손으로 떼어냈다. 서툴지만 야문 솜씨 덕에 나무들이 금세 제 모습을 드러냈다.
'전주대 JJ스타봉사단' 김현희(22·여) 씨는 "흙먼지가 날려서 숨을 쉬기도, 눈을 뜨기도 힘들지만 피해 상황이 TV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며 바쁘게 움직였다.
김 씨는 한 달간의 사회복지기관 실습을 하루 앞둔 이날 휴식 대신 수해복구현장을 찾았다.
타 지역 수해복구를 위해 전주지역 기업도 팔을 걷어붙였다. 마스크제조업체 '인텍'은 황사마스크 800개를 봉사단에게 선뜻 내놨다. 이창선 대표는 "소리 소문 없이 돕고 싶었는데 미안할 따름이다"며 멋쩍은 듯 머리를 긁었다.
짧은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가 되자 폭염이 본격적인 맹위를 떨치기 시작했다. 이날 청주지역에는 오전 11시를 기해 폭염특보가 발효된 가운데 수은주가 32.7도까지 치솟았다. 오전과는 차원이 다른 열기에 봉사자들은 점점 지쳐갔다.
그러나 대학생 김대식(27) 씨는 "덥긴 정말 더운데 실제 수해를 입은 청주시민들 생각하면 덥다고 말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일과 학업을 병행한다는 김 씨는 이날 봉사활동을 마치자마자 야간근무를 위해 급히 익산으로 떠나는 열정을 보였다.
이날 봉사활동에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마을 주민들에게 수지침을 놓던 봉사자 신동섭(78) 씨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내가 조금 아는 걸로 다른 사람의 아픔을 치료해주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고 웃었다.
봉사활동이 끝난 뒤 말끔해진 주목들의 모습. (사진=김민성 기자)
복구 작업이 마무리되자 주목밭 주인 곽 씨의 얼굴에 비로소 웃음기가 돌았다. 그는 "나무가 언제 물에 잠겼냐는 듯 말끔해졌다"며 "이제 배수로를 만들어서 흙이랑 물만 빼면 된다"고 말했다.
청주시가 국가재난정보관리시스템(NDMS)에 등록한 공공·민간시설 피해액은 이날 오후 6시 기준 894억 5000만 원. 사상 최악의 물폭탄이 모든 것을 쓸어간 듯 보였지만 희망의 싹만큼은 아직 살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