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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을 쳐다보고 있는 남자는 갈비가 드러난 깡마른 몸이 인상적이다. 굶주린 듯하지만, 초라해 보이지 않는다. 얼굴과 동작을 보면 결연한 의지가 전해진다. 한 손에 해머를 쥐고 있고, 다른 한 손은 입술을 닦어내는 모습이 어디론가 나아가려는 듯하다.
#2
왼쪽으로 시선이 향한 단발머리 소녀는 불안해하는 눈빛과 초조한 표정이 역력하다. 무언가 두리번거리는 듯하다. 소녀는 두 손으로 해머를 쥐고 있는 남성의 오른팔을 붙잡고 있다. 의지하는 것 같으면서도, 남자를 말리는 것 같다.
이원석 작가가 제작한 강제징용 노동자 부녀상 '희망의 예감'. (사진=이원석 작가 제공)
최근 영화 '군함도' 개봉과 함께 일제시대 노동력과 인권을 수탈당한 '강제징용' 역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부평공원에 청동으로 된 '징용노동자 부녀상'이 광복절이 있는 오는 8월 중 세워진다.
국내에서 징용노동자 상이 세워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 지난해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조선인 강제노동 현장인 일본 교토(京都) 단바(丹波) 망간광산에 세운 바 있다.
징용노동자 상이 세워지는 부평공원은 일제시대인 1939년, 일본 미쓰비시가 운영하던 조병창이 있던 곳. 지금은 미군기지(캠프마켓)가 자리잡고 있어, 여전히 우리에게 온전히 돌아오지는 못한 땅이기도 하다.
이원석 작가. (사진=노컷뉴스)
징용노동자 부녀상을 조각한 이원석 작가(51)는 '강제징용'에 대한 역사를 그저 상징만이 아닌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구체적 내용을 가진 스토리를 담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강제징용의 아픔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싶었다면, 인터넷에서 검색해 흔히 볼 수 있는, '피죽 한 그릇도 먹지 못해 삐쩍 마른 모습 그리고 끌려와서인지 위축된 표정의 남성'을 만들기만 하면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가는 이름 모를 노동자가 아닌 실제 역사적 인물을 모델로 해 동상에 이야기를 담았다. 부녀상에서 아버지의 모델은 이영현 씨, 소녀의 모델은 지영례 씨이다.
이영현(1921~2009) 씨는 조병창에서 일하면서 징용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쟁의를 벌이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조선독립당에 전달하다 일본 경찰에 발각돼 옥고를 치렀다. 지영례 씨(89)는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학업을 그만두고 조병창에 들어가 병원 서무과에서 근무했다.
(사진=이원석 작가 제공)
작가에 따르면, 소녀의 표정은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으려는 의지와 불안, 초조함을 나타냈다. 그래서 아버지의 팔을 잡고 있다. 반면, 아버지는 커다란 해머를 들고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다. 긴박해 보이는 듯한 그의 몸짓은 여차하면 투쟁을 해서라도 독립을 이루려는 의지와 갈망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작품의 제목이 역설적이게도 '희망의 예감'이다. 현실은 강제징용 노동자이지만 독립에 대한 의지를 품고 있는 인물을 그렸기 때문이다. 여기에 작품 벽면 부조부분에 이들 이야기와 정신대 이야기, 일제의 강제징용, 열악한 노동현장과 노동 착취, 참혹한 사고현장, 전쟁 중 떨어지는 포탄 등을 서사적으로 표현해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했다.
주목할 것은 작가가 두 사람을 의도적으로 부녀로 설정한 점이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상 아래 한 가정이 겪는 일로 일반화하면서, 이러한 상황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고 한다.
"강제합병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누구든지 먹고 살기 위해 어떤 일이든지 닥치는 대로 해야 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그 시대에 들어가면 내 이야기, 또는 우리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원석 작가. (사진=노컷뉴스)
그는 기념상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두 가지라고 했다. 하나는 '기억'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반성'이다. 그는 "한국의 기념비들이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며 "그저 저기 가니 뭐가 있더라가 아니라, 기념비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반성할 것인가에 대한 상상력을 보는 이들에게 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역시 이번에 작업을 위해 공부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안 게 있다. 동상이 세워지는 부평 삼능 지역 명칭이 일본어로 하면, 바로 부평에서 조병창을 운영했던 기업 '미쓰비시'(三菱)라는 것이다.
이 작가는 "아직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았는데, 우리는 그 기억을 잊고 그 잔재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다"며 "더 들춰내고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원석 작가. (사진=노컷뉴스)
특히 소녀상이나 징용노동자상을 세우는 것에 대해 일본 측에서 '한일관계에 바람직하지 않다'며 반발하는 것과 관련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고 꼬집었다.
그는 "반성한다고 내 명예가 실추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과거를 기억하고 인정할 수 있는 태도가 훨씬 더 민주성이 보이고, 가치가 올라가는 일"이라며 "아직도 그 사람들의 본성 속에는 한반도를 자기 속국으로 알고 있고, 위안부.독도 등을 아직도 자기 역사의 일부분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더 들춰내고 이야기해서, 그들이 '더 이상 감춰서는 안 되겠다. 건강하게 서로 공정한 선상에서 협의를 하고 인정할 건 인정하자'는 생각이 들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작가는 지난해 촛불집회 때 광화문 광장 한 가운데서 시민들을 맞았던 대형 촛불 모형을 만드는 데도 참여했다. 또 부산 어린이대공원에 있는 일어서 있는 모습의 '평화의 소녀상'도 그의 작품이다.
그는 이러한 공공작품들을 통해 사람들이 '절대 잊지 않고 기억'하는 동시에 좀 더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영상 제작 : CBS노컷뉴스 스마트뉴스팀 강종민·김기현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