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는 삼남의 유수한 화류향(花柳鄕)으로서 진주에 못지않은 기생의 수효를 가져 유두분면(油頭粉面·기름 바른 머리와 분을 바른 얼굴)의 무리가 이르는 곳마다 흩어져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 10월 12일 한 일간지에 실린 기사를 보면 경주가 '화류향'이라고 묘사돼 있다. 역사 유적이 많은 신라의 천년 수도를 요릿집과 기생집이 많은 고장으로 규정한 것이다.
10년 뒤에도 "북방의 평양과 남방의 경주는 역사문화의 발상지로서 색향(色鄕)으로서도 이름이 높은 곳"이라며 표현 수위를 높였다. 경주는 일제가 국권을 침탈한 뒤 어느샌가 기생관광의 중심지가 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펴낸 '일제강점기 언론의 신라상 왜곡'은 언론에 나타난 이 같은 신라 이미지 조작 사례를 모은 책이다. 1880년대 말부터 해방 전까지 조선총독부 관보와 신문, 잡지에 게재된 기사를 학자 6명이 분석했다.
강희정 서강대 교수는 '신라 경주신화 왜곡상'이란 글에서 일제가 경주를 향해 드러낸 모순적인 면모를 파헤친다.
그는 일본인들이 경주를 기생의 도시로 만드는 한편, 의욕적으로 고적(古蹟)을 강조하고 경주를 '조선 유산의 보고'로 홍보했다고 지적한다. 당시 신문과 잡지는 관광지를 소개할 때면 경주를 반드시 가봐야 할 장소로 빠짐없이 꼽았다. 이에 맞춰 일제는 도로와 철도를 놓고 숙박시설을 정비하면서 경주를 관광 명소로 육성했다.
강 교수는 "일제는 신라의 수도, 천년 고도(古都) 경주라는 명백한 사실을 숨기지 않았고 오히려 과장했다"며 "이는 자신들의 치적을 자랑하기 위한 의도적인 조작이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경주 시가를 정비하고 유적을 복원함으로써 마치 선진 문명국인 일본이 야만의 식민지 조선에 시혜를 베푼 것처럼 홍보했다"고 강조한다.
강 교수는 일제의 '경주 띄우기' 이면에는 찬란한 과거와 초라한 현실을 대비시키려는 속셈이 숨어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일제가 경주의 유적을 부각한 데 대해 "현실에 대한 자조와 회한을 불러오기 위한 것이고, 과거와의 격차를 인식해 강점된 현실을 인정하고 안주하게 만들기 위한 의도였다"고 주장한다.
일제는 신라의 장소뿐만 아니라 신라 인물과 역사의 왜곡도 시도했다. 김덕원 명지대 강사는 일제강점기 언론에서 '신라 인물'을 분석해 보면 화랑도의 계율 중에서도 '임전무퇴'(臨戰無退)를 강조하는 경향이 유독 강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천황에 대한 '충'(忠)을 구현하려는 의미였다고 꼬집는다.
이번 연구의 책임자인 김창겸 한국학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일제는 경주에서 많은 문화재를 수탈하고, 경주역 주변에 일본풍 건물을 대대적으로 건립했다"며 "일제강점기에 신라의 역사문화가 왜곡된 과정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언론 매체를 꼼꼼히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288쪽. 1만6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