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주' 스틸컷(사진=영화사 루스이소니도스 제공)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시인 윤동주(1917~1945)의 작품이 일본에서 왜곡 번역됨에 따라, 그가 '역사성'을 잃은 채 단순히 '착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는 비판이 나온다.
오는 12일부터 9월 19일까지 서울 은평역사한옥박물관에서 열리는 '세계가 취(醉)한 우리문학' 기획특별전 프로그램 가운데, 시인 정지용(1902~1950)과 윤동주의 번역문학을 전시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전 세계 42개 언어로 번역된 한국문학을 소개하는 이번 전시를 총괄하는 기획위원단 측은 "정지용과 윤동주는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시기에도 우리말의 육체와 정신을 세계적 수준까지 고양시킨 작가"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전시에서는 윤동주 시의 일어 번역을 둘러싸고 제국주의적 관점을 고수한 이부키 고(伊吹郷)와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오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의 번역을 소개하고 이들 번역가의 시선을 곱씹어보는 자리를 마련한다."
기획위원장을 맡고 있는, 윤동주 연구자인 숙명여대 김응교 교수는 10일 CBS노컷뉴스에 "이부키 고는 윤동주의 시에 적힌 '하늘'(天)을 '빌 공'(空)으로 번역했다"며 "이러한 번역으로 인해 윤동주가 지닌 역사성이 지워졌다"고 지적했다.
"윤동주의 '하늘'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맹자'에 나오는 하늘의 의미다. 윤동주의 '하늘'이 나오는 '서시' 문장을 주의해 봐야 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라는 문장은 '맹자'에 나오는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을 번역한 문장이다. 이 문장을 보았을 때 '天'으로 번역돼야만 의미를 지닌다.”
'맹자' '주역' '추구' 등을 윤동주는 시에 풀어 인용했는데, 이 책들에서 '하늘'은 공(空)이 아니라, 천(天)으로 쓰여 있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둘째 자아성찰의 대상으로 하늘을 생각할 수 있다. '자화상'의 '우물'이나, '참회록'의 '거울'처럼, 하늘은 자신을 반성하는 매체가 되기도 한다. 셋째, 기독교의 하나님을 상징할 수도 있다,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할 때 '하늘'도 '텐'(天)으로 번역한다. 그런데 하늘을 '空'으로 번역하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된다. 이부키 고의 얘기로는 '일본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번역'으로 그렇게 했다고 한다."
김 교수는 "더욱이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라는 영향력 있는 인기 작가는 이부키 고의 번역본을 보고 감화를 받아 윤동주 관련 수필을 썼는데, 그것이 일본 교과서에 실려 있다"며 "그 글에 '서시' 등 윤동주의 시가 몇 편 인용돼 있다. 이로 인해 일본에서는 윤동주의 '역사성'보다는 단순히 '착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고 전했다.
결국 인류애를 저버린, 참혹했던 제국주의 시대에 살며 꿈을 접어야 했던 한 청년 지식인의 현실적이고 치열한 고뇌가 지워진 자리에는, 관념에 기댄 낭만적인 모호성만 남게 됐다는 지적이다.
"윤동주가 생각했던 하늘은 관념이 아니라, '맹자의 하늘' '자아성찰의 하늘' '기독교의 하늘'로 뚜렷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을 '빌 공'으로 번역하면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가 '모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해야지'로
영화 '동주' 스틸컷(사진=영화사 루스이소니도스 제공)
이부키 고의 번역을 비판하는 움직임은 일본에서도 있어 왔다.
김 교수는 "더욱이 이부키 고는 윤동주의 '서시' 가운데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를 '모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해야지'(生きとし生けるもの)로 번역했다"며 "일본에서도 이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윤동주 연구를 위해 가장 실증적인 연구를 해 온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는 이러한 번역에 대해 '결국 당시 살아있는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시가 됐다'는 비판을 제기했다"고 말했다.
앞서 재일동포 2세인 서경식 도쿄경제대학 교수는 이러한 논란에 대해 지난 2006년 한겨레신문 기고를 통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내 생각에 여기에는 단지 번역어의 적절성 수준을 넘는 심각한 문제가 내포돼 있다. 오오무라는 윤동주의 '저항'정신을 강조하고, 이부키는 보편적인 '실존응시의 사랑'을 보려 한다. 이것은 윤동주의 생애나 작품에 관한 해석의 어긋남(차이)에 그치지 않고 식민지 지배라는 현실 그 자체에 대한 감성의 어긋남이 존재한다는 걸 시사하고 있다. 원문을 그대로 읽으면 굳이 '살아있는 모든 것' 따위로 거드름 피는 번역어를 고를 이유를 찾기 어렵지만 일본에서는 이부키 고 번역이 정역본으로 보급돼 있다. 일본의 많은 독자들은 (결코 모든 독자는 아니지만) 일본이 식민지 지배를 통해 조선민족에게 해를 가한 사실을 자세히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꺼림칙한 과거를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윤동주의 시도 가능한 한 일본을 향한 고발로서가 아니라 매우 일반적인 '실존적 사랑의 표백(표출)'으로 읽고 싶어 하는 것이다."
김 교수는 "'서시'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가 가리키는 대상은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로 뚜렷하다"며 "윤동주의 '오줌싸개 지도' 속 부모가 없는 아이들, '병원'의 환자, '해바라기 얼굴'의 여공, 산문 '종시'에서 복선 철도 노동자에 대한 묘사 등이 그 증거"라고 강조했다.
"윤동주의 작품에서는 동시대를 산 노동자들의 모습도 세 차례 등장한다. 윤동주는 그렇게 현실적인 고민을 했다. 그의 '하늘'이 '경천애인' '민심'으로 읽히는 이유다. 이부키 고의 번역에 숨어 있는 문제를 비판한 서경식·오오무라 마스오 교수와 같이 저 역시 여러 차례 이 문제를 지적해 왔지만, 일본의 윤동주 시 번역 논란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도시샤 대학에 있는 윤동주 시비에도 이부키 고의 번역이 새겨져 있다. 이후 새로운 일본어 번역 시집이 5종 나왔지만, 이부키 고 번역의 영향력은 여전히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