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맨 왼쪽)가 23일 서울국제문학포럼에서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대산문화재단 제공)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인류는 심각한 지경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 위험은 인간의 지식 범주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새로운 세상에 열려 있으면서도 우리는 아직도 모르는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라고 경고 했다. 그는 원자력을 '미래로부터 온 전쟁'이라고 규정하고, 눈에 보이는 않은 '새로운 적'의 위험성에 대한 '기록자로서의 임무'를 거듭 다짐했다. 그는 23일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석해 '미래에 관한 회상'을 주제로 한 기조강연에서 이같이 밝혔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통해 원전 피해의 심각성을 고발해온 그는 기록자로서 임무를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수년 동안 저는 꾸준히 체르노빌 지대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더 듣고 보는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통도 정보의 한 형태이고, 우리를 연결시키는 연결고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그는 체르노빌의 위험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지만, 잊혀져가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세계 앞에서 체르노빌은 가상현실이 되었습니다. 평행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이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체르노빌의 의미는 아직도 다 이해되지 못했습니다. 작가들도 입을 다물고, 철학자들도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 많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두 차례의 거대한 재난이 시기적으로 겹쳤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체르노빌 사태 직후 거대한 소비에트 제국이 무너졌습니다. 사회주의대륙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제국의 잔재 위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남을지, 무엇을 믿을지, 그런 문제들이 그들에게는 핵문제보다 더 절실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체르노빌 문제는 시공간적으로 확대되어 수천 년 동안 지구촌 전체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그는 진단했다.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것들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살았고, 지금은 다시 자본주의체제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체르노빌의 의미에 대한 고찰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은 영원히 체르노빌과 함께 살아가야할 테니까요. 인간수명의 관점에서 보자면 방사능 입자들은 영원히, 수천 년 동안 남아있을 것입니다. 체르노빌은 우리의 시간관념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공간감각도 변화시켰습니다. 세상은 하나가 되었습니다...사태가 발발하고 사나흘 후에 체르노빌의 방사능 낙진은 이미 아프리카 상공을 날고 있었습니다. 기술이 인간을 앞지른 것입니다."
23일 열린 서울국제문학포럼. (왼쪽부터) 사회 윤상인, 기조 강연 알렉시예비치, 고은, 김우창, 질의 최원식. (사진=대산문화재단 제공)
알렉시예비치는 원전 사고를 기존의 전쟁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적'이자 '미래로부터 온 전쟁'이라고 정의했다.
"자연이 우리에게 준 모든 기관 - 눈, 귀, 손가락, 코는 제 구실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런 쓸모가 없었습니다. 방사능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냄새를 풍기지도 않았고, 맛을 볼 수도 없었으니까요. 육체를 지닌 것도, 어떤 형상을 갖춘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평생 전쟁을 해왔고, 전쟁준비를 해왔는데, 갑자기! 전혀 다른 형태의 적이 등장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적. 도대체 이것이 무엇인가? 전쟁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은 이것. 하지만 그것은 전쟁이었다. 미래로부터 온 전쟁. 인간이 겪게 될 공포, 우리 벨라루스 사람들이 다른 이들보다 먼저 맞닥뜨리게 된 그 공포로부터 생기게 된 전쟁. 벨라루스 사람들은 자기들을 '블랙박스'라고 부릅니다. 미래를 위한 정보를 기록해 두는 비행기 안의 그 블랙박스 말입니다."그는 자신이 미래를 기록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 재난 상황을 기록하면서 피해자도, 기록자인 자신도 늘 그것을 표현할 말이 부족했다고 고백했다. '말의 재난'을 겪었다고나 할까. 그 예로 사건이 터진 첫날 밤 화재진압에 투입되었다가 순직한 소방관의 아내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밤 화재진압에 동원되어 원자로에 붙은 불을 껐던 모든 소방관들은 치사량의 방사능에 노출되었다. 이 소방관 중 한 사람의 아내는 임신 사실을 숨긴 채 차단망을 뚫고 남편을 만났다.
"'명심하세요. 남편한테 가까이 다가가시면 안 됩니다.! 입 맞추어도 안 됩니다! 쓰다듬는 것도 안 됩니다! 이제 이 사람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방사능 오염물질이에요!' 아마 이런 상황에서는 셰익스피어도 뒤로 물러설 겁니다. 위대한 단테도요. 다가가느냐, 마느냐, 입 맞추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녀는 다가갔고, 입을 맞추었습니다...숨이 넘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편을 홀로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아기를 잃었습니다. 여자아이었던 그 아기는 태어나서 며칠 밖에 살지 못했습니다."알렉시예비치는 환경학자인 알렉세이 야코블레프( 러시아학술원 부회원)과의 인터뷰를 소개하며, 원자력발전의 위험성을 거듭 경고했다.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인류는 원자력 발전을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 것일까요? 아니요, 아닙니다. 새로운 원자력 발전소 건설은 허용돼서는 안 됩니다. 모든 원자력 발전소는 원자폭탄입니다. 원자력 발전소는 핵무기처럼 위험한 것입니다. 전 세계 어떤 나라의 국민도 그들이 방사능의 위협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원자로 하나가 지구의 절반을 오염시킬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체르노빌사태에서 교훈을 얻고 우리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살행위와 같은 것입니다.자연과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철학이 필요합니다."알렉시예비치는 기록자로서의 임무를 재삼 환기하며 강연을 맺었다.
"죽어가는 헬기조종사를 방문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그는 불타고 있는 원자로의 구멍 속으로 모래주머니를 떨어뜨려 넣다가 방사능 낙진을 들이마셨습니다. 사실 그에게 몸이라고 할 만한 것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눈뿐이었습니다!...그분이 저의 방문을 얼마나 기뻐했는지 아마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기뻐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제가 죽기 전에 오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보았지만,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선생님도 혹시 이해를 못하셔도 기록이라도 남겨두세요. 그러면 나중에 누군가는 이해하지 않겠습니까..."
23일 서울 교보생명빌딩 23층 컨벤션홀에서 진행된 서울국제문학포럼. (사진=대산문화재단 제공)
서울국제문학포럼은 대산문화재단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로 23일부터 25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