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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의 체스', 아리안 체스와 유대인 체스의 진검 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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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의 체스'는 체스보드를 사이에 놓고 벌어지는 유대인 천재와 독일인 라이벌의 피할 수 없는 승부와 복수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동안 체스를 소재로 했던 많은 문학 작품들이 가장 중요한 말인 ‘킹’이나 가장 강력한 말인 ‘퀸’에 비유되는 인물들의 이야기였다면, 독일 홀로코스트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에서 유대인 주인공은 수용소에 갇혀 끔찍한 고난을 겪는 수많은 ‘폰’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리고 모두가 잠든 수용소의 밤, 그 폰 하나가 역사에서 사라질 승부를 위해 정방형의 지옥으로 뛰어든다.

'폰의 체스'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이자 나치즘의 끔찍한 희생양인 주인공을 통해 역사의 비극을 마주한 인간의 딜레마를 그리며 예상할 수 없는 반전 속으로 독자들을 끌고 들어간다.

독일인 기업가 프리슈는 예측 가능한 사람이다. 매일 아침 7시 30분에 일어나 실내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가벼운 체조 후에 화장실로 향하는 것까지 그의 생활은 정해진 대로 흘러간다. 그런 그의 평온한 일상에 어느 날 예기치 못한 불안이 엄습한다. 대뜸 걸려와 그를 찾는 전화 한 통. 프리슈의 비서는 평소와 달리 프리슈의 기차 스케줄을 알려 주는 실수를 범하고, 얼마 후 프리슈는 저택에 딸린 정원 미로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마치 시계추처럼 정확하고, 예외를 용납하지 않는 그의 일상은 단지 습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계획에 가까웠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그의 성격은 체스보드 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프리슈는 원리 원칙에 입각해 이성의 범주에서 움직이는 ‘아리안 체스’를 최고의 베리에이션이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이해할 수 없는 도발을 감행하는 게임 스타일은 그에게 ‘모순투성이’에다가 ‘우연’에 기대 승부를 거는 ‘광기’에 불과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 체스’, 프리슈가 찬양하는 이성적인 ‘아리안 체스’에 비해 예측 불가능하며 직관적이고 그래서 열등한 것이었다. 젊은 시절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 프리슈가 만났던 한 유대인 포로는 자신만의 과감하고 독창적인 수로 그의 아리안 체스를 압박해 온다. 인간의 존엄과 개성이 말살당한 그곳에서 시작된 두 천재의 진검 승부! 재앙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아리안 체스의 이성인가, 유대인 체스의 광기인가?

금요일 밤, 뮌헨―빈 급행열차에서 프리슈는 친구와 체스 게임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따금 자신이 그토록 증오했던 대상을 닮아 버리는 법, 프리슈 역시 얼마 전 칼럼을 통해 “모순투성이”에 “호전적”이라 비판했던 바로 그 베리에이션을 따라 수를 두고 있었다. 그때 객실 안으로 스무 살쯤 된 젊은 청년 하나가 들어온다. 감히 체스의 거장 앞에서 유대인 체스에 대해 훈수를 두기 시작한 그 청년은 자신을 소개하며 ‘죽음의 체스보드’ 이야기를 꺼낸다.

체스 선수인 청년의 스승에게는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체스보드가 하나 있다. 거친 헝겊을 기워 만든 것인데, 단추가 곧 말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허름해 보이는 그 보드에는 비밀이 숨겨져 있었는데, 선수가 잘못된 수를 놓으면 말의 머리에서 팔을 거쳐 몸 전체로 전기가 흘러 벼락을 맞은 것처럼 쇼크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집트의 마법사들과 신비주의자들이 생명을 불어넣었다는 그 보드는 선수가 100퍼센트의 확신을 가지고 정확한 수를 두도록 고안되었다고 한다.

미신 이야기를 들었다고 생각한 프리슈는 청년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한 번 확신하면 자신의 확신을 철회할 줄 모르는 성격대로 청년에게 호언장담을 하고 만다. 만약 그 체스보드가 정말 있다면, 그것을 갖기 위해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과연 죽음의 체스보드는 실제로 존재할까? 체스보드의 주인이라는 청년의 스승은 누구일까? 프리슈의 확신이 불행의 도화선이 되어 내리꽂힐 결말은 무엇일까?

'폰의 체스'는 알파고 이전 체스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 준다. ‘인간 체스 기계’라고 불렸던 쿠바의 세계 챔피언 카파블랑카, 무려 27년간 세계 챔피언이었던 독일의 라스커, 정신력이 약해 챔피언에 오르지 못했지만 체스 역사상 가장 독창적인 수를 두었던 루빈스타인까지. 체스가 곧 신앙이었던 이들의 삶을 통해 공정한 승부와 순수한 유희라는 두뇌 게임의 본질을 재건하고자 한다. 치열하게 도전하고 그에 따른 판돈으로 유희를 챙기는 플레이어들의 자세야말로 알파고에 패배를 인정한 시대, 인공지능이 갖지 못한 ‘인간다움’에 가장 가까운 모습일지 모른다.

줄거리

어느 날 아침 모든 일간지가 자택에서 총상을 입고 숨진 독일 기업가의 소식으로 도배됐다. 정원 미로에서 발견된 그의 시신은 총알이 머리를 뚫고 나온 모습이었다. 자살일까? 사고일까? 아니면 범죄에 의한 타살일까? 아니, 그것은 체스의 수였다. 그 수 뒤에 펼쳐진 것은 체스보드 형태의 지옥. 킹도 퀸도 아닌 체스보드 위의 가장 약한 말, 폰이 펼치는 복수의 베리에이션이 오래된 판결을 집행한다.

파올로 마우렌시그 지음 | 이승수 옮김 | 민음사 | 252쪽 | 1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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