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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래머면 족하다"…故 김지석이 남겼던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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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 겸 수석프로그래머. (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지난해 10월 열린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 당시 기자는 개막 3일 째인 7일 김지석 부집행위원장 겸 수석프로그래머와 처음 인터뷰를 가졌다.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의 부재, 외압으로 인한 내상 그리고 태풍 피해까지. 명실상부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였던 부산영화제는 '삼재'를 겪으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개막 초기라 영화제 스태프들 모두 분주한 상황이었다. 갑작스러운 인터뷰 요청이었음에도 김 프로그래머는 바쁜 시간을 쪼개 만남에 응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부산영화제가 그간 겪었던 어려움, 그리고 다시금 영화제의 명예를 되찾기 위한 노력들. 인터뷰에는 따로 싣지 않았지만 김 프로그래머와 명함을 주고 받았던 첫 만남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가 부집행위원장이라는 주요직을 겸하게 된 첫 해였다. 보통 새로운 직책에 오르게 되면 명함 또한 다시 만드는 법이다. 그러나 그가 품 속에서 꺼낸 명함에는 '부집행위원장'이라는 직책이 없었다. 국제영화제 특성상 전세계 영화인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명함임에도, 여전히 수석프로그래머 시절의 명함을 갖고 다니고 있었다.

기자가 "부집행위원장 자리에서 많이 바쁘신 것 같다. 그런데 명함은 새로 안 만드셨나"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글쎄요. 오르고 싶어서 오른 자리도 아니고…. 그냥 수석프로그래머면 족합니다."

분위기를 풀려고 던진 의례적인 질문이 그의 아픈 구석을 건드린 것 같았다. 그럴 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김지석 수석프로그래머와 함께 영화제를 가꾸고 키워 나간 '동지들'은 이제 그곳에 없었으니까.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은 검찰의 고발로 해촉됐고, 전양준 전 부집행위원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지하는 영화인들은 많았지만 철저하게 홀로 남겨진 상황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김 프로그래머도 곧 영화제를 떠나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부산영화제는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정부는 '다이빙벨' 외압의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영화인 9개 단체는 '보이콧'을 선언했다. 정관개정이 이뤄졌지만 한 번 침해 당한 자율성과 독립성은 끝내 영화제의 발목을 잡았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암흑기를 맞이한 부산영화제에서 부집행위원장 자리에 올랐다. 함께 했던 동지들을 정치 보복성 고발로 떠나보낸 상황에서 자신은 묵묵히 영화제를 지키기로 한 것이다. 동시에 어떻게든 영화제를 정상화해야 하는 책임이 지워졌다.

영화제로서도 최선의 선택이었다. 강수연 집행위원장이 영화제에 온 지 1년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제 내부 사정에 훤하면서, 강 집행위원장을 도울 누군가로는 그가 적임자였다.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부산영화제를 향한 영화계, 그리고 외부의 시선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단지 '바다에는 길이 없지만 우리는 섬을 찾아가는 길을 알고 있다'는 자신의 다짐처럼 처절하게 헤엄쳐 왔을 뿐이다.

그는 이야기했다. 영화제는 화려함에 그 역할이 묻혀서는 안 된다고. 영화제가 겪었던 어려움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고. 제도적으로 자율성과 독립성을 쟁취했지만 앞으로 실질적인 강화가 필요하다고. 부산영화제 부집행위원장과 프로그래머이기 전에, 한 사람의 영화인으로서 스스로에게 건네는 각오나 다름없었다.

프로그래머로 남고 싶다는 그의 바람대로 인터뷰 제목에는 결국 '부집행위원장' 직함 대신 '수석프로그래머' 직함을 썼다. 부산영화제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치열한 프로그래머로 살아 온 그에 대한 존중의 뜻이었다.

지난 18일(현지시간)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출장 차 방문했던 프랑스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6세. 부산영화제 프로그램을 위해 매번 가던 출장이었다.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는 그가 프로그램을 구성한 마지막 영화제가 됐다. 인터뷰 당시 그가 영화제 관객들에게 남겼던 한 마디를 적어 본다.

"영화제 준비를 하면서 죽는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을 다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만큼 진정성을 가지고 준비를 했습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안정적이고 좋았던 해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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