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피노자를 대면하고서 진정 놀랐고, 진정 매료되었다네! 나에게 이런 선배 한 사람이 있었다니." ─ 니체
"이 세계의 무죄 선언만큼이나 양심의 문제를 다루는 스피노자의 처치 방식 역시 니체의 관심을 끈다. 양심의 가책은 니체에게 그리스도교 도덕이 만들어 낸 허구 중의 허구, 병폐 중의 병폐다.허구인 것은 인간을 병든 죄인으로 만들어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확보하려는 그리스도교 교회와 사제의 권력욕의 소산이기 때문이고, 병폐인 것은 인간을 신에 대한 죄의식을 떨치지 못하는 병든 죄인으로 만들어 주권적이면서도 건강한 실존의 가능성을 막아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의 프로그램은 가책에서 자유로운 양심을 인간에게 되돌리려는, 인간의 주권적 존재로의 육성에 그 초점이 맞추어진다. 이렇기에 스피노자가 양심을 슬픔이라는 정서의 차원으로 환원한 것은 비록 그 내용에는 동의할 수 없는 니체라도 그 시도 자체만으로도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시도 자체가 양심의 문제와 그리스도교 도덕과의 연계를 끊으려는 노력, 그래서 인간의 무죄 상태를 다시 확보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본문 '스피노자와 니체', 42-43쪽)
"스피노자, 철학자들의 그리스도." ─ 들뢰즈
196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스피노자 연구는 오해와 침묵에 가려진 스피노자를 적극적으로 다시 읽는 '스피노자 르네상스'를 열었다.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시작해 자신의 철학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스피노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게 한다는 사실은 단적인 예다.
'스피노자의 귀환'은 그동안 국내 연구의 성과를 집약해서 한국 독자들에게 스피노자의 진면목을 소개하는 책이다. 이 책은 서동욱과 진태원의 기획 아래 백승영, 김은주, 김문수, 서동욱, 진태원, 박기순, 진태원, 조정환, 최원 등 국내 정상의 철학 연구자 8인이 현대철학과 스피노자의 긴밀한 관계를 추적한다.
이 책은 현대철학의 여명기에 선 세 사상가 니체, 프로이트, 하이데거에서 시작한다. 1부에서는 서구의 전통적 가치를 전복한 니체, 무의식을 발견한 프로이트, 정서가 가지는 근본적 의미를 간파한 하이데거 철학 속에서 스피노자의 흔적을 추적함으로써 어떻게 스피노자가 현대철학을 미리 달성하고 있었는지를 드러낸다.
"니체에게 스피노자는 '선배'이자 동시에 '병자', 그의 철학은 중대한 '철학적 전환'이자 '병자의 현상론'이라는 이중적 평가의 대상이 된다."(18쪽)
2부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들인 라캉, 들뢰즈, 푸코, 바디우의 쇄신에 개입한 스피노자를 보여 준다. 스피노자와 마주쳤지만 스피노자의 철학을 감당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하면서 주체 이론을 전개한 라캉, 초월적인 절대자를 제거한 스피노자적 내재성의 바탕 위에서 존재론을 구축한 들뢰즈, 스피노자의 이름을 내세운 연구를 수행하지는 않았으나 스피노자와 동일하게 실체성보다 관계의 관점에서 개체와 권력을 조망한 푸코, 스피노자가 명시적으로 말한 것 배후에 숨겨진 층으로부터 철학적 영감을 길어 낸 바디우를 탐구한다.
스피노자가 현대철학에 끼친 절대적인 영향력은 정치 철학 분야에 깊은 흔적으로 남아 있다. 3부는 현대의 대표적인 진보적 정치 철학과 스피노자의 마주침을 다룬다. 스피노자의 인간학을 배경으로 이데올로기론을 구축한 알튀세르, 유물론으로서 스피노자 철학이 발휘하는 정치적 힘을 다각도에서 탐구한 네그리, 스피노자에게서 자연학적·정치학적 아포리아를 발견하고, 이것을 예속에서 해방으로의 이행에 자리 잡은 불가결한 요소로 부각한 발리바르를 살펴본다.
책의 말미에는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프랑수아 모로 그리고 앙드레 토젤과의 대담을 실었다. 두 학자는 연구자 김은주의 날카로운 질의에 답하며 스피노자가 현대의 연구로 어떻게 귀환했는지를 세밀하고도 넓게 그려 보이고 있다.
책 속으로스피노자 당대의 보수적인 세력으로부터의 증오, 독일 관념론의 오해, 20세기 의식 철학의 각광 이면으로의 침잠. 스피노자는 잊힌 적은 없으나 올바로 알려질 기회 역시 정당하게 가져 보지 못하고 사상사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눈부신 귀환은 이루어진다. 196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스피노자 연구 이후 스피노자는 진보적인 현대철학자들이 자신의 무기를 주조해 내기 위한 거대한 대장간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헤파이스토스의 망치 끝에서 태어난 아킬레우스의 무구들처럼 강력하게 우리 시대를 흔들어 놓았다. 이 책은 그 진동의 기록이다. ─ 7쪽
“어두운 계몽의 철학자.” 이스라엘의 철학사가 요펠은 스피노자와 프로이트를 한데 묶어 이렇게 칭한 바 있다. 이 모순 형용은 실상 계몽의 극단을 의미한다. 이성의 타자가 적극적 고려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철저한 이성적 인식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우선 그들에게 무지는 빛, 곧 인식의 단순한 반대가 아니다. 인간은 앎을 갈구하는 만큼이나 앎에 저항한다. ─ 스피노자와 프로이트, 61쪽
스피노자와 푸코 두 사람 모두에게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이라는 관념은 예속화하는 권력이 산출하는 가상에 불과하며, 이러한 가상을 극복하는 길은 사회 계약론에 함축된 부정적인 권력 개념 대신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권력 개념(또는 스피노자에게는 ‘역량(potentia)’ 개념)을 바탕으로 기존의 예속화와 다른 주체화의 양식을 모색하는 길이었다. ─ 스피노자와 푸코, 219~220쪽
제국의 정복이 깊어질수록 우리 시대는 더욱더 스피노자의 시대와 가까워진다. 즉 사람들이 희망보다 두려움에 이끌리고, 삶을 확장하려 하기보다 죽음을 면하는 데 목표를 두며,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복자에게 예속되어 목숨을 부지하는 것에 목표를 두는 강제된 선택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영원성의 관점에서 볼 때, 다중의 능력의 한계에서 주권이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주권의 한계는 다중이 결정한다. 그리고 다중은 자유로워질수록 두려움보다는 희망에 이끌린다. ─ 스피노자와 네그리, 421~422쪽
대중은 폭력적이고, 불안정하고, 자질이 없으므로 정치에 대한 공적 논의에 참여시킬 수 없다는 귀족주의자들에게 스피노자는 대중은 정말 그렇다면서 기꺼이 양보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덧붙이죠. 인간의 본성은 똑같은 이상, 귀족주의자들에게서도 똑같은 악덕이 발견될 것이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비밀을 좋아하는 취향이 있어 전제정을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정치적 문제는 대중과 더불어 논의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 모로와의 대화, 522~523쪽
서동욱 (엮음) , 진태원 (엮음) 지음 | 민음사 | 640쪽 | 3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