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주적(主敵)이다""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 국민은 혼란스럽습니다. '너는 나쁘니까 너랑 싸울 거야'라고 말해야 한다면서, 동시에 한 가족이 되라니요? (미리 귀띔하자면 현재 국방백서에 '주적'이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분단의 특수성에 기인한 우리 민족의 비극이지요. 북한은 우리에게 그야말로 '하나인 듯, 하나 아닌, 하나 같은' 존재입니다.
헌법은 북한과 하나가 돼야 한다고 말합니다. 헌법 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밝히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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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상대방이 자꾸 시비를 걸어옵니다. 못된 짓도 서슴지 않고 있어요. 이럴 때에는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역대 정부의 대응 방식은 달랐습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방식을 고수한 정권도 있었고, 그래도 통일을 위해서라면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정권도 있었죠.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개념이 '주적'입니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국방부에서 발간한 국방백서에 처음으로 등장했죠.
"'외부의 군사적 위협과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한다' 함은…(중략)…북한을 주적으로 상정하면서 우리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외부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며…" (1995~1996년 국방백서)
그런데 김영삼 정부가 처음부터 주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건 아닙니다. 정권 초기에는 노태우 정부를 따라 외부의 위협을 지칭하는 '적'이라는 표현을 썼어요. (노태우 정권에서조차 북한은 주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적의 무력침공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고…" (1988년 국방백서)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해프닝이 있습니다. (사실은 이게 해묵은 주적 논쟁의 시발점이 된 게 아닌가 하는 강한 의구심이 듭니다만.) 지난 1992년 1월 28일 한 보수언론에 보도된 기사 때문에 국방부가 발칵 뒤집힌 적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북한을 대상으로 했던 국방부의 주적 개념이 주변 열강을 겨냥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는 내용이었는데요, 국방부 내부에서조차 "주적이란 말은 처음 들어본다", "선전포고와 같은 것"이라며 정정보도를 요구하는 등 반발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자가 임의로 '주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인데, 훗날 이 표현은 주적 논쟁을 거쳐 국방백서에 당당히(?) 자리잡게 됩니다.
김영삼 정부는 지난 1994년 3월 국방백서의 국방목표를 개정했어요. '적'이라는 표현을 삭제하는 대신 '외부의 군사적 위협과 침략'이라는 표현을 넣었죠.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적 대신 위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관례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개정안이 담긴 1994~1995년 국방백서가 보수층 사이에서 논란이 됐어요. 북한이 주적이라는 표현을 왜 빼느냐고 난리였죠. 애초부터 그런 표현은 없었는데 말이죠. (제가 국방백서에 나온 국방목표를 꼼꼼히 살펴봤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국방목표가 개정된 지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아 북한 박영수 단장의 '전쟁 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이라는 발언이 나왔습니다. 남북관계마저 험악해지면서 1995~1996년 국방백서에 북한은 주적이라는 표현이 명문화되기에 이르렀죠.
주적 표현은 김대중 정부 초기까지 국방백서에 남아있다가 2001년 국방 주요 자료집에서부터 자취를 감춥니다. 북한의 반발이 있었고, 김대중 정부가 해당 표현을 삭제해달라는 북측 주장을 수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죠.
노무현 정부도 주적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외부의 군사적 위협에 대해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 핵실험, 대량살상무기, 군사력의 전방배치 등은 우리 안보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고 구체화했죠.
이명박 정부도 정권 초기에는 이런 기조를 유지하다가 2010년 국방백서에서 '북한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라는 표현을 추가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의 국방백서를 그대로 따랐죠.
결과적으로 현재 국방백서에는 주적이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따라서 바른정당 유승민 대선 후보가 지난 19일 KBS 토론회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 후보를 상대로 "정부 공식문서에 북한이 주적이라고 나온다"고 지적한 내용은 틀린 말입니다.
국방백서에 나오는 표현은 정권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대북 제재를 중요하게 여긴다면 북한을 주적으로 규정해도 상관 없겠지만, 남북 간 대화를 중시한다면 북한을 주적으로 규정하지 않으려 하겠죠.
다만, 북한을 주적으로 규정할 경우 과연 통일의 물꼬를 틀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모순(矛盾)'의 고사가 저절로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