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연애 유무로 어떤 사람의 상태를 '구분'한다. 누가 정했는지, 과연 타당한지 의문이지만 여하튼 '연애 적령기'로 여겨지는 20~30대일 경우, '왜 연애를 안 하니?'라는 질문을 피하기는 쉽지 않다. 창비학당과 한국여성의전화가 도대체 그놈의 '연애'란 무엇인지를,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살펴보는 '사랑에도 공부가 필요하다' 강의를 마련했다. '괜찮은' 연애를 하고 싶은 사람에서부터, 대안적 연애에 관심을 두는 사람까지 연애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을 수 있다. 3월 24일부터 5주 동안 매주 금요일에 펼쳐질 이야기를 들어본다. 기사화를 반려한 2강 '이성애를 고민하다'(3/31)를 제외한 4편의 기사가 나갈 예정이다. [편집자 주][글 싣는 순서]
① 연애·결혼 중인데도 연인이 떠날까봐 불안하신가요?② 벽 밀치기, 강제키스, 폭언…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계속>
지난해 방송된 KBS2 드라마 '함부로 애틋하게'. 극중에서 남자주인공 신준영은 여자주인공 노을에게 폭언을 하고 데이트폭력을 저지르는 인물로 등장한다. (사진='함부로 애틋하게' 캡처)
#1. 연적과 함께 있는 여자주인공을 본 남자주인공. 여자주인공을 데리고 나와 둘만 남겨졌을 때 벽에 밀치고 강제키스를 한다. 여자주인공이 거부하는데도 멈추지 않고, "뭐하는 짓이야?"라는 물음에 "내가 네 남편이란 걸 알려준 거야"라고 쏘아붙인다.
#2. 호텔 방에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만 있는 상황. 남자주인공이 "자고 싶은 거 아니면 지금 말해. 문 열어줄게"라고 말하자, 여자주인공은 "나 안 나갈 거야. 한 발짝도 안 움직이고 네 옆에 있을 거야"라고 답한다. 여자주인공을 침대에 눕히고 덮칠 듯한 자세로 옷 지퍼를 내린다.
위에 나타난 예시는 각각 2006년 방송된 드라마 '궁'과 2016년 방송된 '함부로 애틋하게'의 한 장면이다. 데이트폭력, 데이트강간으로 볼 수 있는 행위지만, 드라마에서는 남녀 주인공의 '갈등' 정도로만 건드린다. 이럴 때는 꼭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음악까지 흐른다. 10년이 지났지만 트렌디 멜로드라마에 나오는 클리셰 같은 장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김선영 TV평론가는 7일 '사랑에도 공부가 필요하다' 3번째 강의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멜로드라마 속 데이트폭력과 대안적 연애'를 주제로, 드라마 속에서 데이트폭력이 어떻게 미화 혹은 은폐되는지를 살폈다.
◇ 1990년대, 2000년대의 '전형적' 캐릭터들김 평론가는 트렌디 멜로드라마를 '유행에 민감한 젊은 시청자 층을 대상으로 하는, 로맨스가 핵심인 드라마'라고 설명했다. 굉장히 감각적인 연출 기법을 동원해 연애의 전 과정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데 집중하기 때문에, 이런 드라마에서 나오는 데이트폭력 씬은 화제성과 영향력이 더 크다는 점을 짚었다.
극중에서 데이트폭력을 행하는 위치는 남성이고 이를 감수하는 쪽은 여성인 만큼, 드라마 속 데이트폭력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시대별 남자주인공 캐릭터의 특성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87 민주화 항쟁을 거친 이후였던 1990년대에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남성 캐릭터들이 나타났다. 세련된 매너, 부드러운 성격, 잘생긴 외모와 몸매 등으로 대표되는 1990년대 '남자주인공'의 예로는 '사랑을 그대 품안에'의 강풍호(차인표 분), '별은 내 가슴에'의 강민(안재욱 분), '느낌'의 3형제 빈(손지창 분), 현(김민종 분), 준(이정재 분) 등이다.
1990년대의 새로운 남자주인공의 탄생을 알린 드라마 MBC '사랑을 그대 품안에', MBC '별은 내 가슴에'
김 평론가는 "이때부터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의 사랑을 얻기 위해 굉장히 노력하기 시작한다. 여성층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새로운 표상으로서 등장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때의 남자주인공도 '가부장'의 틀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김 평론가는 "폭력적인 가부장 대신, 세련되고 온화한 얼굴의 가부장의 모습을 보인다"며 "여성이 위기에 빠졌을 때 구출하고 보호하는 장면이 굉장히 영웅적인 연출과 함께 등장하는데,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로 머물게 하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외환위기라는 폭풍우가 지나간 2000년대에는 보다 직접적인 의미의 '나쁜 남자'들이 탄생했다. 일과 사랑을 동시에 쟁취하고자 했던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는 다시금 '청순가련형'으로 퇴행했다.
'명랑소녀 성공기'(2002), '풀하우스'(2003), '파리의 연인'(2004), '궁'(2006), '꽃보다 남자'(2009), '파스타'(2010), '시크릿 가든'(2010) 등 숱한 히트작들이 '까칠한데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인' 남자주인공을 중심으로 하는 서사를 펼쳤다.
김 평론가는 "여자주인공들이 닭대가리, 돼지토끼, 붕어, 애기, 서민 등 폭력적 별칭으로 불린다"며 "(남녀의) 사회적인 위치와 간극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계약관계로 이루어진 커플이 많다"고 말했다.
◇ 2010년대, '나쁜 남자' 서사에 균열이 일어나다
SBS '별에서 온 그대'(2014)의 외계인 도민준은 자신이 가진 특별한 힘을 여성 캐릭터를 제압하는 데 쓰지 않았다. (사진=SBS 제공)
다행스럽게도 2010년대의 남자주인공들은 과거의 전형적인 캐릭터에 균열을 내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박수하(이종석 분)나 '별에서 온 그대'의 도민준(김수현 분)은 특출난 능력을 갖고 있지만 여자주인공을 구속해 수동적인 위치로 모는 데 쓰지 않는다.
김 평론가는 2010년대가 심각한 여성혐오를 보이는 '일베'의 성행에도 역설적으로 여성주의적 작품이 등장한 시기라고 보았다. '아내의 자격'(2012)은 전업주부 여성들의 노동을 경시하는 세태를 꼬집었고, '직장의 신'(2013)은 비가시적이었던 여성의 노동 문제를 전면에 드러냈다.
'치즈 인 더 트랩'(2016)에는 소시오패스적인 성향을 지닌 남자주인공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나쁜남자 판타지 뒤의 '공포'를 바라보는 여자주인공이 나오며, '청춘시대'(2016)에는 아예 데이트폭력의 피해자가 등장해 문제의 심각성을 환기시킨다.
◇ 참신한 관점으로 '연애'의 다른 면 보여준 드라마들최근 대안적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도 긍정적인 신호다. 김 평론가는 특히 노희경 작가의 작품을 추천했다.
'괜찮아, 사랑이야'(2014)에는 서로의 상처를 공감하지만 각자의 상처는 스스로 해결해야 할 몫으로 둔 남녀 주인공이 나온다. "사랑은 상대를 위해 뭔가 포기하는 게 아니라 뭔가 해 내는 거야"라는 대사는 '노희경 로맨스'의 지향점을 보여준다.
나이도 관계도 다양한 노년들이 극을 이끌고 가는 '디어 마이 프렌즈'(2016)는 이성애를 중심으로 다루면서도, 이성애를 넘어서는 여성들 간의 뜨거운 연대 등 다양한 관계를 담아냈다.
이성애 중심의 로맨스뿐 아니라 여성의 연대, 모녀의 애증 관계 등 다양한 구도를 담아낸 tvN '디어 마이 프렌즈' (사진=tvN 제공)
'노희경의 로맨스'는 위계적 시선 없이 등장인물들을 동등한 인간으로서 묘사하고 있고, 사랑을 특별히 낭만적으로 포장하거나 사랑과 삶을 굳이 분리하지 않는다는 게 김 평론가의 분석이다.
김 평론가는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매체비평을 하는 이유는, 기존과는 다르게 매체를 바라보자는 의미"라며 "애정을 갖고 재미있게 (드라마를) 보시되, 어떤 표현들이 너무 문제의식 없이 클리셰로 굳어지지 않나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