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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드로잉’으로 다시 만난 세상, 모든 게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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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받기 싫어 데이트 ①] 펜 드로잉

“또 자?” 주말마다 잠으로 피로를 푸는 남편이 못마땅했는지 아내는 오늘도 성을 냈다. 그렇다고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면 ‘또 영화냐’고 할 거면서. 일이 아니면 집 밖에 나가기 싫은 나는 찾아야 했다. 일과 데이트를 한 번에 해결할 방법을. 이 이야기는 더 이상 구박받기 싫어 데이트 코스를 찾아다니는 한 남편의 발버둥기(記)이다. 이름하여 ‘구박받기 싫어 데이트’.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펜 드로잉’으로 다시 만난 세상, 모든 게 새로웠다
(계속)

어플리케이션 '프립'에서 발견한 여행지 펜 드로잉 수업.(사진=하루드로잉 제공)

 

아내와 즐길 색다른 데이트 코스를 찾던 중에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펜 드로잉 교육이었다. 한 어플리케이션에서 발견한 이 교육은, 수강생들의 후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나를 설레게 했다.

선은 삐뚤빼뚤한 게, 한 마디로 말하자면 투박했다. 비전문가의 그림이라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사진과는 다른 매력이 느껴졌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애정이 보였다고나 할까.

그 그림들을 보며, 이 코스 저 코스 찍고 이동하기 바쁜 게 아닌, 한 여행지에 진득이 앉아 저렇게 그림을 그린다면, 그 여행지는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2년에 ‘협동조합’ 기획 취재 때문에, 이탈리아 북부 트렌토 지역을 방문한 뒤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가야한 적이 있었다. 트렌토에서 로마로 이동한 뒤 다시 공항으로 가야 했는데, 6시간 정도 로마에서 관광할 여유가 있었다. 그 반나절의 여유 시간을 만들기 위해, 나는 한국에서 취재 일정을 짤 때 정말 많은 계산을 했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가고 싶었던 곳은 ‘바티칸’이었다. 공항까지 이동 시간을 고려하면 내게는 딱 3시간이 주어졌다. 제대로 보려면 짧게는 반나절, 길게는 하루가 걸린다는 그 여행지를 3시간 동안 한 바퀴 돌며, 몇몇 코스에서 반드시 '사진'을 남겨야 했다. 누군가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 사진 한 장을 남겨보겠다는 일념으로 성당 내부를 빨빨 돌아다녔다. 바티칸 성당 위에서 바라본 광장 풍경. (사진=유연석 기자/노컷뉴스)

 

가 본 사람들을 안다. 바티칸이 오래된 건물이고 통로가 워낙 좁아 1명씩밖에 다니지 못한다는 것을. 그곳에서 나의 마음은 오랜 역사가 담긴 유적을 바라보는 경이로움에 빠진 게 아니라, 내 앞의 어르신들을 왜 이리 걸음이 느릴까 하는 초조함에 사로잡혔다.

근 5년이 지나서이기도 하지만, 나는 내가 바티칸에 다녀왔다는 것을 잊고 산다. 아무 기억도 남지 않았다. 남은 건 오로지 사진뿐이다. 그 역시 사진을 우연히 보지 않는 한 잊고 사는 거나 다름없다. 바티칸뿐만이 아니다. 대부분 여행지가 그런 기억으로 남아 있다.

대학 시절 인상 깊게 읽은 책 중 하나가 프레데릭 프랑크의 [연필로 명상하기](류시화 역, 정신세계사)였다. 지금은 절판됐다.

그는 치과의사로 슈바이처 박사와 함께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재능이 많아 화가, 문필가로도 이름을 알렸다. 어느 날 그는 직업을 버리고 스케치북과 연필 한 자루만을 들고 세상을 돌며 만물을 그리는 여행을 떠난다.

그 책머리에는 존 러스킨(1819~1900)의 글귀가 있다.

“어느 날 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가시나무 줄기를 마냥 휘감고 올라간 담쟁이덩굴이 눈에 띄었다. 나는 무심결에 주머니에서 작은 회색 노트를 꺼내 한 귀퉁이에다 세세하게 그 덩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려나갈수록 처음에는 하잘 것 없어 보이던 그 담쟁이덩굴이 점점 마음에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기가 끝났을 때, 나는 문득 내가 철들면서 지금까지의 모든 시간을 그냥 무덤덤하게 흘려보내기만 한 것을 깨달았다.”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과, 사진으로 남기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시간이 달라지면서, 평소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한다. 특히 요즘처럼 스마트폰이 전 국민에게 보급돼, 사진을 찍는 것이 흔하디흔한 세상에서, 사진은 (미안하게도) 너무 흔해서 가치가 낮게만 느껴진다.

펜 드로잉 교육 중 사진.

 

펜 드로잉 수업은 간단한 이론을 배운 뒤 실습 위주로 진행됐다. 2시간이 살짝 넘게 진행되는 수업이기 때문에, 모든 교육은 간결했다. 이 수업은 체험 정도의 수준이고 , 본인이 펜 드로잉에 더 흥미가 있다면 전문적인 교육을 해주는 수업을 추가로 들으면 된다.

처음 만난 6명의 교육생이 10초씩 돌아가면서 옆 사람의 얼굴을 그리는 ‘릴레이 드로잉’부터 시작했다. 첫 만남의 어색함을 푸는 동시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자 시간 제한을 둔 것이다. 교육생들은 마치 게임을 하듯 누군가 10초 사이에 눈을 그리면, 다음 사람이 입술과 코를 그리는 식으로 1명의 얼굴을 완성해 나갔다.

이어 가로, 세로, 기울여 선 그리기와 명암 만들기 같은 기초를 연습한 뒤, 강사가 제시하는 화면의 그림을 그려 나갔다. 같은 그림을 보고도 6명의 시각은 다 달랐다. 어느 도시 풍경을 찍은 게 있으면, 누군가는 지붕 모양에 집중했고, 다른 누군가는 창문에 집중했다. 아무도 보지 못한 지붕 위 안테나를 꼼꼼히 그리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맨 앞의 한 집만 확대해 그리기도 했다.

강사는 “잘 그려야 한다는 부담감을 지우라”고 교육생들에게 계속 주문했다. “사물을 본 뒤 느낀 자기의 생각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자기만의 해석을 담아 자유롭게 그리라”고 했다. 그리고 서로의 그림을 보고 느낀 점을 말하게 했다.

왼쪽이 내가 그린 펜 드로잉, 오른쪽은 아내가 그렸다.

 

마지막으로는 준비물로 각자 준비해오라고 한 그리고 싶은 여행지 사진을 보며 그림을 그려나갔다. 나는 지난해 여름휴가 때 방문한 부산 해운대 사진을 준비했다. 구도가 단순해 쉽게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스테들러 0.1㎜ 펜으로 그리다, 파도 물결 그리기를 망치면서 붓펜을 사용했다. 개인적으로 그림이 지저분한 느낌이 들어 망쳤다고 생각했지만, 강사와 교육생들은 붓펜을 잘 활용한다며 격려해줬다. 참고로 이 수업은 오로지 칭찬만 듣는다.

펜 드로잉으로 다시 만난 세상은 모든 게 새로웠다. 사진으로는 못 봤던 건물과 사람들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지나쳤던 저 건물의 모양이 저렇게 생겼구나, 저 오른쪽 끝에 파라솔이 줄지어 있었구나 싶었다. 하늘과 바다의 색은 막연히 같다고 생각했는데, 바다는 하늘에 비하면 녹색 빛을 띄었다. 부서져서 거품이 된 파도 역시 모래가 섞인 것과 섞이지 않은 것의 색이 달랐다.

무심코 스쳐 지나쳐가는 풀 한포기도 다시 보게 했다. 너무 복잡한 구도만 아니라면 나만의 느낌을 담아 그림으로 순간을 남겨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기초적인 교육만 받았지만 이 정도면 가볍게 취미로 즐기기 적당한 수준이다.

아내와 나는 4월 중순 일본 오키나와로 여행을 떠난다. 회사에서 근속 5년 휴가를 받아, 결혼기념일에 맞춰 오키나와를 방문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그동안의 여행지와는 달리 2시간 정도는 한 카페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무엇이 보일까, 그림으로 남긴 오키나와라는 여행지는 그동안 갔던 곳과는 어떻게 다른 기억으로 남을까, 기대하며 펜을 챙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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