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이 무대 위에서 피어나고 있다. 최근 공연계는 서로 입을 맞춘 것도 아닌데 근대시인들의 삶과 시를 소재로 한 공연이 잇따른다.
현재 무대에 올라 눈에 띄는 시인들은 윤동주(1917~1945)와 이상(1910~1937)이다. 서울예술단은 창작 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4/2,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를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 다시 올렸다. 2012년 초연한 후 이번이 사연째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꼽히는 윤동주가 경성에서 보낸 대학시절, 일본 유학시절, 그리고 형무소에서 죽음을 맞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았다. 윤동주의 대표적인 시 여덟 편을 대사(독백)로 사용하여, 특유의 깊은 여운을 가감 없이 전달한다.
극은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대의 비극에 맞서는 청년의 고뇌를 윤동주의 서정적인 시어로 잔잔하게 전한다. 여기에 음악과 춤이 어우러져 한 편의 종합예술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창작 뮤지컬 '스모크'(~5/28, 대학로유니플렉스 2관)는 시대를 앞선 천재, 시인 이상의 작품을 소재로 한다. 이상의 시 '오감도(烏瞰圖) 제15호'에서 모티브를 얻어 지난해 초연한 작품이다.
순수하고 바다를 꿈을 꾸는 ‘해(海)’, 모든 걸 포기하고 세상을 떠나려는 ‘초(超)’, 그들에게 납치된 여인 ‘홍(紅)’ 세 사람이 아무도 찾지 않는 폐업한 한 카페에 머무르며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다.
'오감도', '건축무한육면각체' 등 천재 시인 이상의 위대하고 불가해한 시는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와 감각적인 음악과 만나 새롭게 다시 태어났다.
극의 비밀스러운 분위기와 캐릭터의 강렬한 감정은 관객의 가슴을 파고들며 강한 울림을 전한다. 작품은 세상과 발이 맞지 않았던 절름발이 이상의 삶과 예술, 고뇌를 세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이밖에 지난 1월 막을 내린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역시 시인 백석의 삶과 시를 주제로 해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시대를 풍미했던 모던보이이자 해방 전 가장 주목 받던 시인 '백석'과 한때 뜨겁게 사랑했던 한 시인을 못 잊어 평생을 그리워한 기생 '자야'의 시와 사랑 이야기다.
지난해 말 공연한 이윤택 연출(연희단거리패)의 '백석우화-남 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 역시 백석의 삶을 무대로 올렸다.
조금 시간이 지난 작품이지만, 2014년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한 김재엽 연출(드림플레이테제21)의 연극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내 안의 김수영을 찾아서'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시인 김수영을 다뤘다.
이처럼 최근 근대시인들의 삶과 시를 소재로 한 공연이 잇따르는 데 대해 '윤동주, 달을 쏘다.'의 권호성 서울예술단 연출은 "시인들의 작품이 잇따르는 것은 우연의 일치이긴 하지만, 시대가 시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게 아닐까 싶다"고 추측했다.
그는 "시인이 하나의 시를 토해내기까지 많은 사색과 아픔이 있을 것"이라며, "아무래도 오늘 이 시대에 많은 시사점을 던지는 아닐까,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소중한 것을 제기하는 게 아닐까 하고 개인적인 생각을 해본다"고 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인 김응교 교수(숙명여대) 역시 "시대가 시인들을 호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김재엽 연출의 '김수영'은 현 시대에 그런 비판적 시인이 요구됐고,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또 지난해 이윤택 연출의 '백석' 역시 개성공단이 폐쇄된 시기에 북에서 남을 절규하며 화합을 호소하는 주변인이 이야기하는 백석의 이미지를 통해 지금을 이야기한 것이다"며 "시대가 김수영을, 백석을, 윤동주를 호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김 교수는 일부 공연이나 영화들이 '잘 팔리는 상품으로서 시인들을 소비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했다. 그는 "상업적 요구로 많이 팔리니까, 시인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단편적인 이해로만 접근하는 경우가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이어 "오는 4월 27일 대산문화재단에서 열리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 심포지움'에서 할 발표를 위해 최근 설문조사를 진행했다"며 "적은 수지만, 응답자 1000여 명 중 9%정도가 윤동주를 싫어한다고 했고, 그 이유로 상품화와 우상화를 꼽았다"고 지적했다.
또한 "윤동주를 어떤 시인이라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민족시인'이나 '저항시인'이라는 답변은 10%도 안 되고, '자기성찰하고 실천을 꿈꾸었던 시인'으로 50% 넘게 응답했다"면서, "(일부 공연이) 시인의 역사성을 강조하려는 점은 이해하지만, 삶의 디테일을 빼고 팬시상품화만 하게 되면 거부감이 들고, 결국 외면받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