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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률의 삿포로 레터]"애국가만 들을 수 있다면" 韓 쇼트트랙 주장의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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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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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만 듣는다면...' 쇼트트랙 여자, 남자팀 주장 심석희(왼쪽)과 이정수가 20일 삿포로아시안게임 1500m에서 각각 은메달과 동메달을 목에 걸고 시상식을 치르고 있다.(삿포로=대한체육회)

 

"쇼트트랙은 개인 종목인가요, 아니면 팀(단체) 종목인가요?"

금메달리스트들은 쉽게 답하지 못했습니다. 아시아 쇼트트랙 장거리 남녀 최강으로 우뚝 서기까지 예리한 스케이트날로 숱하게 빙판을 갈랐던 이들이었지만 단칼에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20일 삿포로동계아시안게임 남녀 1500m 동반 금메달을 따낸 박세영(24 · 화성시청)과 최민정(19 · 성남시청)입니다.

이들이 말문이 막힌 것은 쇼트트랙이란 종목은 개인전이라 해도 단체전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레이스에 나선 선수 각자의 순위로 메달이 가려지지만 시상대에 올라가는 선수 혼자의 힘으로가 아닌 팀 전체의 호흡이 있어야만 하는 게 쇼트트랙입니다.

"개인과 팀, 두 가지 성격이 다 있는 스포츠인가요?"라고 고쳐 묻자 그제서야 둘은 "맞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박세영은 "개인전이라고 하지만 선수단 안에서 팀 전술이 있다"면서 "훈련을 할 때도 상대 레이스를 견제하는 전략이 있고 이후에는 서로 일대일 승부를 펼친다"고 설명했습니다. 최민정도 "첫째는 외국 선수들을 다 같이 이기는 것이고, 다음은 각자 서로 발전할 수 있게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날 펼쳐진 결승 레이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먼저 열린 여자 결승에서 최민정이 금메달을 따냈지만 심석희(20 · 한체대)가 없었다면 어쩌면 이루지 못했을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개인의 능력과 함께 대한민국이라는 팀의 힘이 만든 합작품이었습니다.

'스퍼트의 대결' 최민정(왼쪽)이 20일 여자 1500m 결승에서 막판 심석희를 제치고 1위로 올라서고 있다.(삿포로=대한체육회)

 

이날 심석희는 173cm의 큰 키와 긴 다리로 중반 이후 선두에서 레이스를 주도했습니다. 궈이한 등 중국 선수들이 호시탐탐 역전을 노렸지만 심석희는 튼튼하게 견제하며 1위를 지켜냈습니다.

마지막 두 바퀴 최민정이 승부를 걸었습니다. 궈이한에도 뒤져 있던 최민정은 폭발적인 스퍼트로 제쳐 2위로 올라섰습니다. 여기서부터는 본인의 말대로 일대일, 선의의 경쟁. 최근 몸무게 2kg를 불려 근육을 키운 최민정이 더 강력한 질주를 펼치면서 심석희마저 제쳤고, 결국 둘이 금과 은메달을 나눴습니다.

비록 심석희는 메달 색깔이 바뀌었지만 여자팀 전체로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입니다. 라이벌인 중국에 우승을 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석희는 여자팀 주장답게 레이스 뒤 최민정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격려했고, 인터뷰에서 함께 결승에 나선 동생 김지유(18 · 화정고)가 4위로 마친 데 대해 "지유가 3위를 했다면 싹쓸이를 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아쉬워했습니다.

(다만 아시안게임에서는 동일 국가의 메달 독식을 막기 위해 동메달은 다른 국가 선수에게 주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규정이 있습니다. 김지유가 3위를 했어도 3명이 모두 시상대에 오를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3위를 하고 난 뒤 '옜다, 이거라도 받아라' 메달을 주는 게 모양새는 더 좋았겠지요.)

최민정 역시 막판 역전극에 대해 "한국 선수가 아니라 중국 선수를 제치기 위해서 스퍼트를 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이어 "중국 선수에게 뒤질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 결과가 한국의 금, 은메달이라는 최상의 결과로 나온 겁니다.

'끝까지 막네' 20일 남자 1500m 결승에서 박세영(왼쪽부터)이 1위로 결승선을 향하는 가운데 이정수는 막판까지 중국 우다징의 견제 속에 힘겨운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삿포로=대한체육회)

 

남자부도 마찬가집니다. 박세영이 우승을 차지했지만 남자팀 주장 이정수(28 · 고양시청)라는 든든한 조력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정수가 중국 선수들의 집중 견제를 받는 '희생'을 하지 않았다면 시상대 가장 높은 곳의 주인공은 다른 선수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이날 이정수는 우다징, 한티안뉴 등 결선에 오른 3명의 중국 선수들의 철저한 견제를 받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박세영이 막판 회심의 인코스 공략으로 한티안뉴를 제치고 1위로 나섰고, 결국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막판까지 중국 연합 전술의 표적이 된 이정수는 온 힘을 다했지만 4위로 경기를 마쳤습니다.

경기 후 박세영은 "1500m에서는 정수 형이 강하기 때문에 중국 선수들의 견제가 집중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서 "정수 형이 그러면 나에 대해서는 느슨해질 것이니 승부를 보라고 하더라"고 말했습니다. 2대3 불리한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필승의 전략이었습니다. "중국 선수들은 한티안뉴를 밀어줄 가능성이 컸다"는 박세영의 말대로 중국도 나름 팀 전략을 짰지만 한국 선수의 허를 찌르는 작전이 한 수 위였습니다.

이른바 '미끼'가 됐던 이정수는 기꺼운 희생에 대한 보답을 받았습니다. 결국 한국에 금메달을 안긴 데다 본인도 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박세영의 역주에 당황한 한티안뉴가 이를 제지하려고 손을 썼고, 비디오 판독 결과 실격돼 은메달이 박탈된 겁니다. 그 결과 4위였던 이정수가 3위로 올라서 동메달을 받게 됐습니다. 어쩌면 금메달보다 값진 메달이었습니다.

(중국은 2014 소치올림픽에서도 여자 1000m에서 판커신이 앞서가던 박승희(25 · 스포츠토토)를 붙잡으려고 이른바 '나쁜 손'을 쓴 바 있죠. 중국의 훼방에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박승희는 박세영의 친누나입니다. 그리고 당시 동메달을 따낸 선수는 심석희로 이번 아시안게임에서와 비슷한 역할을 한 바 있습니다. 역사는 돌고 도나 봅니다.)

'형, 고마워요' 박세영(왼쪽)이 20일 남자 1500m에서 우승한 뒤 이정수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삿포로=대한체육회)

 

더욱이 이번 금메달로 박세영은 병역 혜택까지 받게 됐습니다. 이미 2010 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2관왕에 올랐던 이정수가 병역 특례의 선물을 후배에게 안긴 셈입니다.

박세영은 병역 혜택에 대해 행여라도 논란이 될까 조심스러워 하면서도 종목 특성상 상대적으로 짧은 선수 생활을 안정적으로 잇게 된 데 대해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국제대회에서 애국가들 들을 때마다 뿌듯하고 감회가 새로웠다"면서 "오늘은 눈물이 날 뻔했는데 다음에도 애국가를 울리도록 하겠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렇듯 최민정과 박세영의 금메달은 본인들의 강력한 스퍼트가 있었기에 가능했겠지만 그 발판을 마련해준 것은 동료의 도움이었습니다. 아시아는 물론 세계 최강으로 꼽히는 한국 쇼트트랙의 원동력은 바로 이런 끈끈한 동료애와 선의의 경쟁 덕분이었습니다.

심석희는 "민정이와 경쟁은 서로 발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그래서 훈련이나 경기에서 경쟁할 때는 하고, 함께 힘을 내야 할 때는 그렇게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함께 힘내야 할 때는 바로 중국과 한판승부가 펼쳐질 남녀 계주(22일), 최민정은 "다관왕보다 계주를 꼭 이기고 싶다"고 별렀습니다.

이 종목은 개인전에서 선의의 경쟁을 뺀, 쇼트트랙의 진짜 단체전일 겁니다. 최강 한국 쇼트트랙의 아시안게임은 이제 막 시작됐습니다.

'너희들, 우리 잊으면 안 돼' 박세영(왼쪽)과 최민정이 20일 남녀 1500m 금메달을 목에 건 뒤 활짝 웃고 있다.(삿포로=노컷뉴스)

 

p.s-아무리 한국 선수단이 동반 우승을 차지했다고 하지만 어떻게 아쉬움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심석희도 주장답게 의연함을 유지했지만 자신의 주종목에서 놓친 금메달은 욕심이 났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결과가 아쉽지만 좋은 결과가 나왔다"면서 "주종목에서 마지막 부분에서 아쉽긴 했지만 보완점을 느꼈다"고 말하는 심석희의 표정에는 살짝 아쉬움이 묻어났습니다.

2014 동계올림픽 기간 띄웠던 '소치 레터'를 대회 이후 후기로 쓴 적이 있습니다. 세 번째 후기는 '쇼트트랙, 로맨스와 불륜의 아슬아슬한 경계'라는 제목이었는데 이번 '삿포로 레터'와 어쩌면 딜레마라는 점에서 비슷한 주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주제는 결국 쇼트트랙은 스피드를 경쟁하지만 기록보다 순위가 중요한 종목으로 같은 팀 선수끼리 다른 팀 선수의 침투를 막는 게 중요한데 국내 선발전에서 이른바 '짬짜미'로 비난받지만 국제대회에서는 훌륭한 전략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레터의 주제는 쇼트트랙은 겉으로는 개인전이라도 결국은 팀 스포츠라는 겁니다. 반대로 팀 워크가 중요하지만 결국은 개인의 경쟁으로 갈 수밖에 없는 딜레마가 생긴다는 겁니다. 참 어려운 종목입니다. 또 그래서 더 재미있는 종목일 수도 있는 쇼트트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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