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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로 되살아난 '유신의 망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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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박정희 ①] 대를 이은 문화예술계 '찍어내기'로 표현의 자유 탄압

지난 4년 동안 박근혜 정권에서 벌어진 민주주의 후퇴와 시민 탄압은 1960~70년대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을 놀랄 만큼 빼닮았다. CBS노컷뉴스는 서슬 퍼런 박정희 정권 당시 문화·예술, 노동, 언론 등 각 분야에서 탄압받았던 이들을 찾아 나섰다.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현 정권에서 부활한 유신의 망령을 5차례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블랙리스트로 되살아난 '유신의 망령'
(계속)

블랙리스트 따위를 만들어 문화예술계 인사들에게 재갈을 물리려 한 박근혜 정권의 행태는 40년 전 출판금지 등 무차별 검열로 표현의 자유를 틀어막았던 박정희 시대를 연상시킨다.

권력을 비판하거나 반대 목소리를 내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가차 없이 찍어내는 모습은 흡사하지만 현 정권에서는 오히려 더 비밀스럽고 교묘하게 이들에 대한 탄압이 진행되고 있었다.

◇ '금서의 시대'…"눈에 거슬리면 탄압"

1977년 '창작과비평'에서 출판한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 저서 '8억인과의 대화' (사진=창비 홈페이지 캡처)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쓴 저서 '8억인과의 대화'가 정부에 의해 별안간 '출판금지(판매금지)'를 당한 건 유신독재가 절정에 달하던 1977년.

출판사인 '창작과비평'은 이로 인해 심각한 경영난에 빠졌고 발행인까지 검찰에 기소되면서 사세가 급속히 기울었다. 다음 해 곧바로 출간 권수가 절반으로 토막 나기도 했다.

그저 외국의 중국 전문가들이 쓴 책을 번역했을 뿐인데 저자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 무렵 같은 저자가 썼던 '우상과 이성'에 우리 정치 현실에 대한 비평이 담겨 있었고, 이를 고깝게 본 정부가 보복성으로 이러한 조치를 내렸다는 게 다수 전문가의 해석이다.

서울 마포구 공덕동 현대실학사 편집실에서 만난 정해렴(77) 전 창작과 비평 대표. 실학 전문가이기도 한 그는 최근 저서 '편집·교정 반세기'를 출간했다. (사진=김광일 기자)

 

당시 창작과비평 편집부장이었던 정해렴(77) 선생은 취재진과 만나 "특별히 검열에 걸릴 만한 내용도 없었는데 그땐 워낙 어거지였다"며 "독재가 상당히 심화돼 막 누를 때라 속수무책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특히 창작과비평이 탄압의 주 대상이었고 제일 많은 책이 판매 금지가 됐었지만 그때는 다들 그렇게 당했다"면서 "정부는 자기 눈에 거슬리면 탄압한다는 오만한 생각이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후 유신 체제가 들어서면서 박형규 목사의 '해방의 길목에서', 장준하 선생의 '죽으면 산다', 현기영 작가의 '순이 삼촌' 등 수많은 책이 판매금지·회수 명령을 받았다. 당대는 '금서의 시대'라고 불렸다.

뿐만 아니라 가요·영화·공연 등 대중문화에서는 사상이나 이념 등을 문제 삼아 광범위하고 노골적인 검열이 이뤄졌다.

10차 촛불집회에서 가수 신대철 씨가 연주한 '아름다운 강산'(신중현 곡)이 대표적이다. 신씨는 "서슬 퍼런 독재권력자 박정희의 강권을 거부하고 (아버지가) 우리나라를 아우르는 노래를 만들었지만 (숨겨진 메시지 때문에) 이 곡 역시 금지곡이 되었다"고 밝혔다.

◇ "노태우 때 사라진 블랙리스트…30년 만에 부활"

더불어민주당 김민기 의원이 28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문화예술인블랙리스트 추정 문건을 공개했다. (사진=윤창원 기자/자료사진)

 

군사독재가 물러간 자리에 민주화의 꽃이 피면서 표현의 자유에도 뒤늦게 발동이 걸렸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최근 청와대가 주도해 작성한 '블랙리스트'가 공개되자 문화예술계 안팎에서는 '구시대적 탄압'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지난 26일 CBS라디오 '정관용의 시사자키'에 출연해 "이런 리스트는 유신과 전두환 정권까지 있었고 (노태우 정부 때부터는) 없어졌다"면서 "심각한 헌법 위반"이라고 일갈했다.

박정희 정권에서 고초를 겪었던 창작과비평도 어김없이 탄압의 대상이었다. 유 전 장관은 "창작과비평 같은 경우에 (지원대상에서) 빼라 그랬는데 나중에 창비를 빼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관련자들이 굉장히 혼이 났었다"고 폭로했다.

명단에 포함된 원로 연극배우 손숙 씨는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몇 사람이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는 건 감지하고 있었지만 명단이 있다는 건 설마설마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명단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놓고 "굉장히 유신 시대 분"이라며 "문화계를 관리해 꼼짝 못 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성토했다.

◇ 지원금 절실한 예술가 '손쉽게 찍어내기'

지난 10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 진상규명 예술행동 및 기자회견'에서 참석한 예술가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자료사진)

 

특히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문화예술 종사자의 경우 정부의 '찍어내기' 위협에 더욱 취약하다. 구조상 당국의 지원금이 활동의 지속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연출가 윤한솔(44) 씨는 지난 2014년 '안산순례길' 거리극을 기획했다. 극에는 세월호참사를 암시하는 내용이 상당수 포함됐다.

그는 지원금을 받기 위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지원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탈락했다. 심사 과정에서 외압이 작용했다는 내부고발은 한참 뒤에야 폭로됐다. 이 위원회는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블랙리스트'를 넘겨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윤씨는 "연극은 공적자금에 대한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이를 빌미로 협박해 검열하기가 쉽다"면서 "이는 결국 예술가들의 표현에 족쇄를 채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근혜 정권에서는 이처럼 비밀스럽고 교묘한 방식으로 문화예술계 종사자들 가운데 눈엣가시인 이들을 손쉽게 찍어내 왔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면, 비선실세 최순실의 측근인 CF 감독 차은택의 경우 '문화계 황태자'로 군림하며 대기업 광고를 독식하는 것은 물론 장·차관 인사까지 주무르는 등 특혜를 넘어 권력을 휘둘렀다.

정해렴 선생은 이에 대해 "블랙리스트라는 건 옛날 독재사회에서 전수된 노하우를 토대로 작성됐을 것"이라며 "자기 눈에 거슬리면 탄압한다는 오만한 생각이었을 텐데 이는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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