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리스도가 위대한 혁명가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내가 믿는 것입니다. 그의 전체 교리는 보잘것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에 대한 헌신입니다. 그의 교리는 인간에 대한 학대, 불의, 비하에 대항하는 투쟁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정신과 그 정수와 사회주의 사이에 공통점이 많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피델 카스트로는 ‘왜 사회정의에 대한 생각이 종교적 신념과 충돌해야 하는가? 왜 그리스도교와 충돌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한다.그가 종교와 관련된 여러 사안에 대해 판단하는 관점은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카스트로, 종교를="" 말하다="">는 브라질의 도미니코회 수사신부 프레이 베토 사제와 쿠바 혁명군 사령관 피델 카스트로의 대담집이다. 1985년 5월, 쿠바의 수도 아바나 혁명궁전에 있는 카스트로의 사무실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네 번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삶과 신앙, 종교와 정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읽어나가다 보면, 옮긴이의 말대로 “누가 혁명가인지, 누가 신학자인지 모를 정도로 이해와 화해 그리고 상호 존중이 서로에게,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그리스도인과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의 대화는 신앙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해방의 실천, 정의의 요구, 공동체적 삶을 위한 이타적인 봉사의 차원에서 열려야 합니다.”(베토)
-“그날 일한 누구에게라도 한 데나리온을 지급하는 것은 전형적인 공산주의 공식대로 필요에 더 합당한 분배를 의미합니다.”(카스트로)
-“가난한 이와 소원해진 사람은 그리스도와 소원해진 사람이라고 이전에 당신이 말했습니다.”(베토)
-“일찍이 당신은 ‘가난한 이를 배신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배신한다’고 말했습니다.”(카스트로)
-“우리는 한 사람이 신앙인이면서 동시에 일관된 혁명가일 수 있으며 그 둘 사이에 극복할 모순은 없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베토)
-“‘너의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연대를 실천한다는 의미입니다.”(카스트로)
피델 카스트로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에 대해 본격적으로 들려준다. 비란의 시골집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가족 이야기, 피델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던 일, 가톨릭 학교생활은 마르크스주의에 입문한 대학 시절로 이어진다.
“나는 종교적인 소명이 넘치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더 많은 능력을 요구하고, 더 나은 교육을 하는 학교에 있었습니다. 나는 스포츠와 지금도 여전히 즐기는 시골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특히 배구, 축구, 야구 등 스포츠를 많이 좋아했습니다.”
“아버지의 땅은 미국인 소유인 대농장들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설탕 수확 후 비수기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에 왔습니다. ‘일이 필요해요. 일을 주세요.’ 다른 사람들이 농장의 잡초를 한 번 뽑는 동안 아버지는 두세 번의 잡초 뽑기를 준비해서 일이 필요한 사람에게 일을 주었습니다. 방학 때마다 나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청소년 시기에 아버지는 나를 사무실에 데려가거나 가게에서 일을 시켰습니다.”
“나는 혁명 이념을 가지고 마르크스 저작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빈부차이를, 엄청나게 많은 토지를 소유한 가족과 전혀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이미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 나에게 계급들로 나뉜 사회와 인간의 착취를 설명해주었습니까? 나는 그 일들을 모두 직접 보고 어느 정도 겪기도 했습니다.”
피델 카스트로는 베토 신부에게 몬카다 무장 수비대 공격 당시를 비롯해 쿠바 혁명 전후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나는 바닥에 엎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나를 죽이려고 한다면, 그대로 총을 쏴야 할 것입니다.” 몬카다 공격 당시 체포되었을 때도 피델은 엎드리지 않고 이렇게 외친다. “쏘지 마. 생각을 죽일 수는 없어”라면서 피델과 동료들에게 향한 총구를 막아주었던 장교 페드로 사리아는 훗날 혁명에 의해 임명된 대통령의 첫 번째 경호대장이 되었다.
시에라 마에스트라 부대에 가입한 사르디나스 신부에 관해 말할 때, 그는 혁명의 동기에 공감한 사제를 동지로 받아들인 지도자이자 수많은 대자를 둔 인자한 대부의 면모를 보인다.
“사르디나스 신부는 군인이 아니라 사제로 가입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매일 함께 목숨을 나누고, 같이 살며 군대와 함께했습니다. 그는 모든 군대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많은 가족들이 나에게 아이들의 대부가 되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것은 쿠바에서는 두 번째 아버지가 되어달라는 말입니다. 사르디나스 신부는 거기서 수십 명의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나는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많은 대자들을 두었습니다. 농민들은 우리와 매우 밀접한 유대를 맺었습니다. 그것은 우정 이상이었고, 가족 관계와 더 흡사했습니다.”
혁명 동지인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에 대한 애정 어린 회상도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CBS노컷뉴스 김영태 기자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