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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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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이희호 평전'

 

이희호 여사의 고난 속에서도 빛나는 삶을 담은 <이희호 평전="">이 출간되었다. 한국 현대사와 민주주의, 그리고 남편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한 여정을 담았다. 이 평전은 2015년 4월부터 2016년 11월까지 한겨레신문을 통해 총 80회에 걸쳐 장기 연재된 내용을 보완한 것이다.

이희호는 김대중과 만나기 전에 이미 주목받는 사회운동가였다. 미국에 유학한 유망한 사회학 연구자로 강단에 섰고, 여성문제연구회의 창립을 주도했으며, 대한YWCA연합회 총무로서 여성기독교운동을 이끌었다. 결혼 후에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 여성문제연구회 회장, 대한YWCA연합회 상임위원, 범태평양ㆍ동남아시아 여성연합회 한국지회 부회장 등으로 왕성히 활동한다. 대통령 부인 시절에는 한국여성재단을 만드는 데 힘을 쏟고 명예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1989년 가족법 개정을 주도한 사람이 당시 평민당 총재였던 김대중이었다는 점과 국민의 정부 시절 여성부가 출범한 사실 등도 주목할 만하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서로를 칭할 때 ‘동행자’, ‘동역자’라는 표현을 즐겨 쓰곤 했다. 이희호는 김대중과 가장 깊은 신뢰로 묶인 평생의 동지였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부산 피란 시절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던 ‘면우회’를 통해서였고, 6년 뒤 각각 YWCA 총무와 정치초년생이던 시절 우연히 거리에서 만나 서로의 고민을 나눈 게 그 다음 만남이었다.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젊은이로 서로 알아간 것이다. ‘이상하리만큼 말이 잘 통하는’ 동지로서 말이다.

그 뒤 김대중은 상처(喪妻)의 절망을 딛고 민의원에 당선되지만, 5ㆍ16쿠데타로 다시 정치낭인이 되고 만다. 이 좌절의 시기에 큰 힘이 된 동료가 바로 이희호다. YWCA 총무 일로 바쁜 이희호가 시간을 내면 무일푼의 실업자였던 김대중이 찾아와 함께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밥값이나 찻값은 이희호가 냈다. 마흔이 다 된 나이였고, 김대중은 애도 둘 있는 처지였다. 둘 사이에 흐르는 감정은 연애감정보다는 동지의식에 가까웠다. 나누는 이야기도 주로 시국에 대한 것이었고, 지식인들의 정치토론에 가까웠다. 그러는 중에 서서히 교감이 커졌고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도 깊어졌다. 이희호는 그렇게 김대중의 동반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김대중이 가지는 남자로서의 매력, 인간 자체의 매력도 중요했지만, 이희호가 결혼을 결심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도와야겠다’는 마음이었다. 당시의 김대중은 ‘민주주의와 조국통일에 대한 큰 꿈을 품었으나 모든 것을 잃고 나락에 떨어진 사람’이었다. 이희호는 이 남자의 꿈이 꿈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을 도우면 틀림없이 큰 꿈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지요.” 주변의 만류에도 결혼을 결심한 이유다.

“아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내 아내 덕분이고, 나는 이희호의 남편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미국 망명 시절 한 강연에서 김대중이 한 말이다. 동행자 이희호가 없다면 정치인 김대중도 있을 수 없을 것이란 평가는 이들을 잘 아는 사람들이 공히 인정하는 바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당시 이희호는 찬조연설에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만약 남편이 대통령이 돼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습니다.”

김대중의 신조 ‘행동하는 양심’의 그 양심 한가운데 이희호가 있었다. 숱한 권력의 탄압 속에서 그의 민주주의 신념이 흔들릴 때마다 이희호의 존재는 중요한 버팀목이 되었다. 유신독재 시절 옥중의 남편에게 보낸 다음 편지를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신이 늘 말하는 바와 같이, 행함이 없는 양심은 악의 편에 속한다 하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야고보서 4장 17절)”

이희호가 김대중과 함께한 세월의 태반은 핍박과 죽음의 불길이 어른거리는 환난의 시간이었다. 유신독재 시절 남편은 망명 아니면 수감으로 집을 비웠고, 남편 없는 집에서 이희호는 정보기관에 둘러싸여 감금에 가까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을 ‘내란 음모’로 몰아가 감옥에 묶어두었다가 온 가족을 미국으로 망명 보내기까지 한다. 그 시절 신념과 의지를 지키고 두려움을 이겨내게 해준 것이 신앙이었다. 기댈 것은 기도뿐이었다. 몸과 마음이 갈라지고 부서질 것 같았지만 기도로 버텼다.

이희호에게 신앙은 자유, 정의,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를 찾으려는 싸움의 보이지 않는 최후 무기였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하느님의 사업에 동참하는 것이 남편의 할 일이었고, 그렇기에 남편의 목숨을 지켜달라고 하늘에 간구했던 것이다. 그 신앙이 권력의 압력에 굴하지 않는 용기의 원천이었다.

민주화를 향한 끈질긴 싸움은 결국 1987년 6월 승리로 이어졌지만, 절반의 승리였을 뿐이다. IMF 환난 속에서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이 탄생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민주주의는 위태롭다. 이희호가 오늘도 인권과 민주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기도하는 이유다.

이희호는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고 높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한길을 걸었다는 것을 기억해주었으면 합니다.”라고 말한다. 그가 한 기여에 비하면 소박한 바람이다.

집필을 맡은 고명섭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은 “이희호가 살아온 지난 한 세기의 역사는 해방, 통일, 인권, 민주주의를 향한 길고도 힘든 격투의 시간”이었다며, 그 역사를 만든 민중의 노고와 그 민중 열망의 물결을 타고 절망의 최저점과 희망의 최고점을 함께 오간 이희호와 김대중의 삶을 온전히 그려내려고 노력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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