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문래근린공원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흉상이 빨간색 스프레이 페인트로 훼손돼 있다. 흉상의 얼굴, 계급장, 군복에는 빨간색 페인트가 칠해졌고 좌대에는 '철거하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 시인 김수영 '기도' 중에서◇ "내년 2017년은 윤동주·박정희 탄생 100돌"내년 2017년은 시인 윤동주와 전 대통령 박정희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고,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 명동마을에서 태어났다. 내년 100돌을 기념해 박정희 기념사업은 1873억 원이라는 천문학적 비용을 들여 정부 주도로 기념관, 기념식, 기념우표 등을 계획하고 있다. 반면 윤동주 100주년 기념은 몇 가지 심포지엄 외에는 차분하고 소문 없이 진행될 예정이다.
책 '처럼-시로 만나는 윤동주'의 지은이인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54, 시인·문학평론가)는 14일 CBS노컷뉴스에 "이번 촛불집회를 통해 박정희(1917~1979)에 대한 허상이 완전히 깨지고 지워지길 바란다"고 역설했다. 김 교수는 "노예적·도구적 인간을 만드는 것이 바로 박정희 정신"이라고 비판했다.
"1917년 윤동주와 박정희가 태어났을 때 두 아이는 얼마나 해맑고 귀여운 아이였을까요. 두 사람의 삶이 확연히 달라지는 것은 20대부터입니다. 1938년 학번으로 윤동주는 연희전문에 입학하고, 1939년 박정희는 (일제의 괴뢰정권인)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합니다. 박정희는 스물두 살이던 1939년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 1942년에 우등생으로 졸업하면서 졸업생 대표로 '만주국의 왕도락토(王道樂土)를 지켜 대동아공영권을 확립하는 성전에 참여, 벚꽃처럼 산화하겠다'라는 답사를 낭독했습니다. 앞서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하면서도 혈서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이라고 썼는데, 이 말이 나중에 우리나라 육군사관학교의 돌에 새겨졌어요.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도 상당히 일찍 했죠. 결국 이 사람(박정희)은 전체주의의 부속물로서, 스스로 도구적 존재가 되기를 바랐던 겁니다."
"(당대 일본 제국주의로 상징되는) 전체주의의 도구가 되겠다는 인간형이 박정희의 세계관이고, 그것이 딸 박근혜로 이어지면서 (지금 한국 사회에서까지도)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진단이다.
"지금 촛불집회가 만들어낸 정국은 시민혁명의 초기 단계예요. (노태우 정권이 혁명의 에너지를 앗아갔던 1987년 6월항쟁 때처럼 상황이) 충분히 뒤집힐 수 있다는 말이죠. 박정희의 후손들은 끊임없이 박정희를 반인반신으로 만듦으로써 어버이연합, 엄마부대처럼 (그를 추종하는) 노예적 인간들을 양산해 왔어요. 에리히 프롬(1900~1980·독일 출신 사회심리학자)이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염려했던 것처럼 (박정희 정신은) '자유'를 버리고 '노예'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키워 온 거죠. (내년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비) 1873억 원을 들여 우상화 작업을 하려는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더 나아가 사람들을 영구적인 노예로 만들려는 시도가 바로 역사교과서 국정화입니다."
◇ "도구적 노예 양산하는 '박정희 정신' 대 자유로운 단독자 키우는 '윤동주 정신'"
숙명여대 김응교 교수(사진=김 교수 페이스북 페이지 화면 갈무리)
김 교수는 박정희와 같은 해에 태어나, 마찬가지로 내년에 탄생 100돌을 맞는 시인 윤동주(1917~1945)를 "박정희와 상반되는 삶의 궤적을 지닌 인물"로 지목했다.
"윤동주는 버티다 버티다 1942년 1월 29일 창씨개명을 합니다. 전체주의의 압제에 괴로워하며 창씨개명 하기 닷새 전에 쓴 시가 '참회록'입니다. 스물두 살이던 1938년 연희전문에 들어간 윤동주의 모든 시에는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으려는 자유로운 '단독자'의 정신이 들어 있습니다. '나무가 춤을 추면/ 바람이 불고// 나무가 잠잠하면/ 바람도 자오'라고 노래한 (짤막한) 그의 시 '나무'만 봐도 그래요. 박정희의 세계관이 '바람에 완전히 충성하는 나무'라면, 윤동주는 '나무도 바람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본 것이죠."
그간 윤동주 연구에 천착해 온 김 교수는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박정희가 상대를 (상명하복에 따라) 충성하는 '도구적 존재'로 봤다면, 윤동주의 존재론은 한 사람, 한 사람과의 관계가 모두 소중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서시'의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표현은 자유로운 단독자의 것이죠. 시 '오줌싸개 지도'에서도 보면, 이불에 오줌을 쌌지만 빨 수 없어 그냥 빨래줄에 걸어둔 결손가정 아이들에 주목하듯이 한 명 한 명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게 윤동주의 세계관이에요."
그는 "이렇게 인간론에서 두 사람(박정희와 윤동주)의 삶이 대비 되는데, 이는 두 사람의 후손들이 취하는 자세만 봐도 단적으로 드러난다"며 말을 이었다.
"박정희를 신앙적 존재로 만들려는 그의 후손들과 달리, 윤동주의 후손들은 그분의 책이 많이 팔리는 것마저도 조심합니다. 윤동주를 기념하는 도서관 건축도 반대하신 분들이에요. 우상화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살'리고 싶어했던 윤동주 정신을 살리고 싶은 것이 유족 분들의 마음이죠. 그분들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윤동주의 정신을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람을 움직이는 거대한 '나무'와 같은 존재로 성장해 나가길 바라고 있어요. 윤동주의 정신이 제대로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후손들은) 윤동주가 우상화 되는 것을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는 겁니다."
◇ "윤동주 시처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혁명적 존재"
내년 나란히 탄생 100돌을 맞는 시인 윤동주(왼쪽)와 박정희 전 대통령(사진=자료사진)
"두 사람의 죽음까지도 비교할 필요가 있다"며 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박정희의 죽음은 1979년 10월 26일(향년 61세),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27세)입니다. 박정희의 죽음은 '사람을 죽이는 죽음'이에요. 그의 죽음 뒤 박정희 동상이 어마어마하게 세워지고, 국정교과서까지 강조되면서 사람을 노예로 만들고 있으니까요. 반면 윤동주의 죽음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긍심을 주는 '살리는 죽음'이에요."
'윤동주처럼 살기란 어떤 것이냐'는 물음에 김 교수는 먼저 '자아성찰'을 꼽았다. 그의 표현을 오롯이 빌리면 "자기 존재의 고유성을 사랑하는 인간"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고 한 '서시'를 보세요. 자기를 철저하게 바라보는 키에르케고르(1813~1855·덴마크 출신 철학자)의 '단독자' 정신, 성경으로 말하면 '너희는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라'가 아니라 '너희는 이미 빛이요 소금'이라는 예수의 마음인 겁니다. 결국 윤동주 정신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우쳐 준다는 데 의미가 커요."
김 교수는 특히 "모든 언론, 논문이 윤동주를 '자아성찰' 안에 가두고 있다"며 "윤동주는 그야말로 혁명의 시인"이라고 강조했다.
"윤동주는 1941년 4월 31일 쓴 시 '십자가'에서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라고 하잖아요. 1941년 11월 29일 쓴,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죄로 코카서스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먹히는) 프로메테우스가 등장하는 시 '간'에서도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라고 노래해요. 저는 이것을 1980년대,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허리에 밧줄을 묶은 채 건물에 매달려 목숨 걸고 유인물을 뿌리던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헌신성이라고 봅니다."
"윤동주처럼 산다는 것은 스스로를 냉철하고도 고독하게 바라보는 것, 그것을 방 안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쪼개어 광장에서 촛불을 들든, 독거노인을 위해 연탄을 나르든 자기 능력껏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라고 김 교수는 말했다.
"꼭 정치적 행위뿐 아니라, 주변의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살피는 사회, 그 자체가 곧 혁명이라고 저는 믿어요. 윤동주의 시처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혁명적 존재입니다. 이러한 윤동주 정신을 계승한 것이 김수영(1921~1968)의 시예요. 윤동주가 '쉽게 쓰여진 시'에서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라고 노래한 것을 이어받아 김수영은 시 '푸른 하늘을'에서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이라고 전합니다. 4·19혁명이 지난 뒤인 1960년 5월 18일에 김수영은 시 '기도'를 통해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고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 "민초들 낱낱의 개성에 뿌리내린 시민정신 되살리는 '11월 혁명' 돼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 제7차 촛불집회가 열린 지난 1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세월호 희생자를 기리는 의미로 304벌의 구명조끼가 놓여져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
김 교수는 "성찰 없는 시민이 주도하는 혁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며 "끝내 미완에 그친 4·19혁명, 6월항쟁 등은 시대정신을 교체하지 못했다는 데 실패의 원인이 있다"고 분석했다.
"특별한 지도부 없이 학생들, 여성·장애인·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 외국인 관광객까지 다양한 주체들이 만들어가는 촛불집회는 윤동주에서 김수영으로 이어져 온 정신이 살아 있는 현장이에요. 수많은 단독자들이 박정희에서 박근혜로 계승된, 인간을 억압하는 전체주의의 도구적 노예에 항거하는 모양새를 갖고 있으니까요."
한편으로 김 교수는 "매주 집회를 나가면서 6월항쟁 당시 전두환·노태우를 떠올리기도 한다"며 "'박근혜 퇴진' '새누리당 해체'에만 집중하다가 정작 중요한 시대정신과 시스템의 교체를 놓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라고 우려했다. "정권 교체를 넘어 '시대' 교체를 이뤄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지금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사고·시스템으로 바꿔 나가려면 우선 사상적 노예를 양산해내는 국정교과서부터 빨리 없애야 합니다. 최저임금 시급도 현재 시간당 6470원에서 1만 원 이상으로 시급히 올려야 해요. 그동안 어른들은 '대학생들의 이기주의'라는 식으로 뭐라 해 왔는데, 이번에 제자들이 집회에 정말 참가하고 싶어한다는 걸 실감했어요. 결국 학생들을 옭아매 왔던 알바로부터 다소 자유로워지는 길은 최저임금을 대폭 올리는 겁니다. 비정규직도 어서 타파돼야 해요. 그렇게 육체적 노예의 틀을 부숴야 합니다. 결국 그동안 우리를 개·돼지로 전락시켜 서로 싸우도록 만들었던 정책들을 하나씩 없애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말이에요."
김 교수는 "(박정희 정신을 신봉하는) 저들은 언제든지 민초들을 속일 마음을 갖고 있다"며 "지금 그 시간을 벌고 있을 테니, 절대로 안심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탄핵정국은) 장기화될 겁니다. (미국산 쇠고기 협상 문제와 이명박 정권에 대한 불신으로 타오른) 2008년 촛불집회 당시 나중에는 50만 명씩 쭉쭉 빠져나가면서, 마지막에는 종각 앞에서 30명이 모여 촛불을 든 적이 있어요. 저들이 바라는 것도 이런 모습이겠죠. 결코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끝으로 "박정희 정신의 대척점에 있는 윤동주 등을 우상화하는 것 또한 철저하게 경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윤동주뿐 아니라 조영래, 장준하, 함석헌, 전태일을 비롯해 이름 없이 스러져 간 수많은 민초들 낱낱의 개성에 뿌리내린 시민정신을 되살리는 '11월 혁명'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박정희도 윤동주도 어릴 적 꿈을 지녔을 때는 모두 다 아름다웠을 겁니다. 문제는 구조에 있다고 봐요. 박정희가 악의 중심에 서면서 그 악을 유지하기 위한 구조를 만들었을 때, 박정희의 악은 구조화됐어요. 그 구조화된 악이 우리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거죠. 반대로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을 것 같은 윤동주가 만약 해방 뒤에도 살아 대학교수가 되고 국회의원이 됐다면 어땠을까요? 악의 시험대에 올랐을 수도 있어요. 결국 우리가 순수한 윤동주, 악으로 구조화 되기 전의 순수했던 박정희를 간직하지 못한다면, 우리 안에서도 위험한 악의 시험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거예요. 나 자신이 도구적 노예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 성찰하며 두 눈 부릅뜨고 경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