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말했다. '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라. 거기서 그물을 내려라." 예수가 말한 '깊은 곳'은 갈릴래아 호수의 어딘가가 아니었다. 저 푸른 파도의 어디쯤이 아니었다. 그곳은 신의 속성이 잠들어 있는 우리 안의 심연이다. 그 깊은 마음의 골짜기다. 우리가 다시 돌아갈 고향이다. 거기서 그물을 내려야 한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런데 심연이 어디인가? 그걸 알아야 갈 게 아닌가." 답은 어렵지 않다. 나의 고집이 무너지는 곳. 거기가 바로 심연이다. 고집에 가려서, 에고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내 안의 깊은 곳이다. 거기서 치유의 비가 내린다. - 본문에서
<흔들림 없이 두려움 없이>는 ‘예수는 누구인가’, ‘어떻게 예수에게 다가갈 수 있는가’, ‘예수의 말씀에는 어떤 이치가 숨어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중앙일보 '현문우답' 칼럼을 연재하며 일상 구도자로서 내면 탐색을 이어온 백성호 기자가 예수에 대한 물음을 품고 이스라엘로 떠났다. 백성호 기자는 종교인 혹은 신자로서 순례를 떠난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 속에 숨겨진 깨달음을 구하는 탐구자적 자세로 2000년 전 예수가 거닐던 나자렛 골목과 갈릴래아 호숫가를 걸었다. 예수가 엎드려 기도하던 바위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씀을 전하던 언덕에서 다시 읽는 성경은 한 구절 한 구절 새로운 의미로 저자에게 다가왔다.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예수의 말씀을 파고들자 숨어 있던 의미들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벽을 깨며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자는 바로 그 자리에서 지금 우리 곁에 살아 있는 예수를 만나고 그 메시지를 만났다.
저자는 다른 종교와 사상을 거리낌 없이 대입함으로써 깨달음을 구한다. 때로는 붓다가, 때로는 선불교의 대선사가, 이슬람 영성가가 예수의 말씀에 이르는 길에 함께한다.
책 속으로 그럼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것만 신비일까. 내 안에서 길어 올린 두레박의 물이 온갖 마음으로 바뀌는 것도 신비다. 예수가 보여준 첫 이 적은 우물에서 길어 올린 마음을 어떻게 쓸지를 보여준다. 카나에서는 혼인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하객들은 아쉬워하고 혼주는 난감한 상황이었으리라. 그때 예수는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했던 것, 그것을 만들었다. 나는 거기서 ‘예수의 마음 사용 설명서’를 읽는다. “네 안에 신의 속성이 있다.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처럼 너는 온갖 마음을 창조할 수 있다. 마치 물을 포도주로 바꾸듯이 말이다. 필요한 때, 필요한 장소에서, 필요한 이에게, 필요한 마음을 창조해서 써라.” ―65~66쪽
예수의 영성도 마찬가지다. 안으로 들이마신 다음에는 바깥으로 내쉬어야 한다. 일상을 향해, 현실을 향해, 사회를 향해 내쉬어야 한다. 가난한 마음을 찾고, 그 마음으로 하루를 살고, 다시 가난한 마음을 찾고, 그 마음으로 우리 사회에서 사는 거다. 가난한 마음을 찾는 게 ‘들숨’이고, 그 마음으로 하루를 사는 게 ‘날숨’이다. 그게 그리스도교의 영성이자 사회적 실천이다. 우리는 그런 행위를 ‘수도(修道)’라고 부른다. 그 와중에 ‘에고의 눈’이 ‘예수의 눈’을 점점 닮아간다. ―113쪽
예수는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라고 했다. 마음의 창고를 비우라는 말이다. 우리의 창고는 늘 무언가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창고를 채우고 있는 것, 그건 바로 ‘집착(attatchment)’이다 . 접착제처럼 끈적이면서 내 마음의 창고를 채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집착이다. 집착할 때 마음의 창고가 가득 찬다. 집착을 비울 때면 창고도 빈다. 그 이치를 꿰뚫은 예수가 말했다.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 불교에서는 이를 “마음을 내려놓으라.”라고 표현한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 나라의 문턱을 넘는다. 불교는 불국토(佛國土, 부처님 나라)의 문턱을 넘는다. 그 문턱을 넘어가는 첫 번째 징검다리가 서로 닮았다. ‘마음의 창고를 비워라.’ ―129~130쪽
원수는 왜 생겨날까. 그것은 잣대 때문이다. 잣대의 왼쪽은 선, 오른쪽은 악이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이 원수가 된다. 예수의 말처럼 그 원수를 사랑하면 어찌 될까. 선악을 가르던 잣대가 무너진다. 그 잣대가 무너지면 어찌 될까. 우리는 돌아간다. ‘선악과 이전’으로 돌아간다. 혜능이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라."고 한 이유도 그렇다. 그럴 때 우리는 선과 악 이전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게 ‘완전함’이다. 그래서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말했다. -155~156쪽
CBS노컷뉴스 김영태 기자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