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8일 정세균 국회의장과 면담을 위해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에 들어서는 모습.(윤창원 기자)
저는 스포츠기자입니다. 2004년 스포츠 전문지 입사 이후 두 군데 회사를 거친 10여 년 대부분을 체육 현장 취재로 보냈습니다. 정치 기사는 수습 기간 국회를 출입했던 3개월 남짓 이후 거의 써본 일이 없습니다. 정치에는 워낙 문외한인 데다 스포츠를 태생적으로 좋아해 청와대나 국회, 정부 쪽으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 제가 요즘 정치 관련 기사를 쓰는 것은 스스로도 꽤나 낯선 일입니다. 2016년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특수한 상황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위세를 업은 한 민간인 일가가 한 국가의 통치 체계를 농단한 희대의 사건. 이에 따라 '최순실 특별취재팀'에 파견돼 있는 까닭입니다.
물론 취재는 최순실 일가의 검은 손길이 예의 미친 체육 분야 관련이 주를 이룹니다. 그러나 이들의 국정 농단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인사와 체육 정책, 특히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한 '비정상의 정상화' 지시까지 긴밀하게 연결돼 있어 이번 사태의 취재에 정치나 체육 등 구분이 따로 없을 겁니다. 해서 최근에는 정치 관련 이슈를 나름 꼼꼼히 챙기고 있습니다.
어제(20일) 청와대 브리핑도 마찬가집니다. 검찰이 최순실·안종범·정호성 공소장을 통해 박 대통령의 공범 혐의를 적시한 데 대한 청와대의 반응을 지켜봤습니다. 대통령의 최측근 최 씨와 대통령이 수족처럼 부렸던 안 전 경제수석, 정 전 비서관 등은 이번 사태의 핵심 인물이거나 연결 고리입니다.
그런데 청와대 브리핑을 듣는 동안 저는 불현듯 북한 방송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분기탱천한 말투와 듣기 거북할 정도의 투쟁적 표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통수권자의 입을 대신한다는 청와대 대변인과 북한 정권의 입장을 선전하는 평양방송 아나운서를 일견 구분해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이게 정말 韓 검찰에 대한 靑 브리핑인가요?청와대 대변인은 어제 브리핑에서 검찰 수사팀의 발표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며, 객관적인 증거는 무시한 채 상상과 추측을 거듭해서 지은 사상누각"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스포츠기자를 하는 동안 정치 관련 뉴스는 그렇게 유심히 지켜보지 않은 까닭에 청와대의 이런 표현이 그동안 자주 있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가 원수가 자국의 최고 수사 기관인 검찰 발표에 대해 할 수 있는 표현인지는 사뭇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물며 검찰총장은 대통령이 임명한 인사임에에랴.
청와대는 어제 브리핑에서 '검찰의 일방적 주장', '전혀 입증되지도 않은 혐의', '성급하고 무리한 수사 결과 발표' 등의 강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검찰이 특별사수사본부까지 꾸려 20일 넘게 밤낮으로 들인 공은 증거 없는 '상상 수사'였다는 말일까요?
북한 평화방송 리춘희 아나운서.(자료사진=평양방송 캡처)
이런 어조와 표현은 그동안 북한 방송 매체에서는 자주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북한 핵이나 한미 군사 훈련 등 민감한 이슈와 관련해 북한은 방송과 선전 매체 등을 통해 거친 언사로 남한과 미국을 맹비난해왔습니다.
북한이 그동안 한국 정부의 주장에 대해 "황당한 궤변을 마구 쏟아냈다", "함부로 입방아질인가", "위선과 기만으로 여론만 흐리게 했다"는 등의 전투적인 표현을 써가며 부인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청와대와 검찰은 남북한의 관계와는 다릅니다. 불행히도 남북은 군사 대치 중인 적이지만 청와대와 검찰은 한 국가의 통치 체계를 이루는 근간입니다. '무시' '일방' '전혀' 등의 불통을 의미하는 단어들이 난무하는 관계는 아닐 겁니다.
▲'정권 버티기' 朴과 北, 뭐가 다른가요?그동안 검찰은 박 대통령에게 충분히 소명할 기회를 줬습니다. 최순실 씨와 안종범 전 수석, 정호성 전 비서관을 수사한 검찰은 충분한 증거를 확보했고, 이에 대한 확인을 위해 청와대에 조사 일정을 통보했습니다.
하지만 소명 기회를 차버린 것은 박 대통령입니다. 검찰은 지난 15~16일에 이어 17~18일에도 박 대통령에 대한 조사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이에 모두 불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청와대는 검찰 수사 발표에 대해 "객관적인 증거는 무시한 채 상상과 추측을 거듭해서 지은 사상누각"이라고 맹비난을 한 겁니다. 청와대가 제기한 '검찰의 일방적 주장', '전혀 입증되지도 않은 혐의', '성급하고 무리한 수사 결과 발표'는 박 대통령이 검찰 조사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자업자득의 결과입니다.
이제는 박 대통령이 탄핵 정국을 유도해 끝까지 버티기에 들어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입니다. 실제로 청와대는 어제 브리핑에서 "차라리 헌법상·법률상 대통령의 책임 유무를 명확히 가릴 수 있는 합법적 절차에 따라 하루빨리 이 논란이 매듭지어지기를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사실상 탄핵 정국까지 가겠다는 겁니다.
지난 19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최순실 게이트' 진상규명과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4차 '2016 민중 총궐기 대회'에서 촛불을 든 시민들이 행진하는 모습.(사진=박종민 기자)
이런 박 대통령의 고집이 북한과 무엇이 다를까요? 북한 역시 핵무기 개발과 각종 인권 유린에 대해 "사정을 모르고 함부로 떠들지 말라"며 비난합니다. 북한만 모르고 전 세계 모두가 다 아는 사실에 대해 한사코 부인하며 끝까지 정권을 놓지 않고 버티고 있습니다.
'최순실 게이트'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요? 전 국민이 이번 사태의 몸통이 누구인지, 주범이 누구인지 다 알고 있지만 오직 청와대만이 부인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끝까지 정권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청와대 브리핑에서 자연스럽게 북한 방송이 떠오르는 게 아닐까요? 분연히 촛불을 들고 외친 100만의 함성은 청와대를 넘어 저 북한에까지 들렸을 텐데, 왜 고집불통 한 사람만 알아듣지 못하고 있을까요?
p.s-스포츠기자를 하는 동안 기사에 박 대통령을 언급한 게 몇 번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2014 소치동계올림픽 현장 취재 기간 중 띄웠던 '임종률의 스포츠레터' 중 특별히 제목에 박 대통령을 넣은 적이 있습니다. '안현수 "朴 대통령님, 올림픽 끝나고 다 말할게요"'는 제목이었습니다.
소치에서 화려하게 부활한 '쇼트트랙 황제' 안현수(빅토르 안)와 그 러시아 귀화 과정에 비위가 없었는지를 알아보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를 묶어 풀어쓴 칼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올림픽이라 대통령도 스포츠에 대해 이렇게 관심을 두고 있구나 하는 마음에 반갑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배경에 최순실 씨의 이권이 개입됐다는 점에서 씁쓸함이 남았던 기사이기도 했습니다. 2013년부터 박 대통령이 강조했던 스포츠계 비리 척결 지시에는 최 씨의 딸 정유라의 입신과 양명, 또 최 씨 일가의 체육계 장악이라는 목적이 있었다는 의혹이 밝혀진 겁니다.
이제 '최순실 파문'이 가라앉으면 저는 아마도 짧은 정치 쪽의 외도를 마치고 다시 체육팀장으로 복귀할 겁니다. 특별취재팀에 얼마나 더 오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제 기사에 박 대통령이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하루 빨리 모든 국민이 원하는 바를 인지하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