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통사'는 20세기 동양사학의 최고 석학 중 한 명인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교토대학을 정년퇴직한 뒤 일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저술한 중국사 개설서이다. 중국사는 물론이고 동서양의 역사를 아우르는 저자의 박람강기를 바탕에 놓고 마치 에세이를 쓰듯이 쉽고 재미있게 중국사 전반을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중국사의 핵심적 요소들을 집약해 보여준다. 왕안석의 신법을 비롯해 당시 세계 최첨단의 문명을 자랑했던 송대 사회에 대해 특히 비중 있게 다루고 성리학에 기반한 대의명분론을 내세운 정치가들이 나라의 쇠퇴와 멸망을 자초했다고 질타한다. 천자 독재 체제에서 천자의 역할이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에 천자를 중심으로 한 정쟁이나 내조와 외조 세력의 대립 등도 풍부한 에피소드들과 함께 소개된다.
치세와 난세를 호경기와 불경기로 파악하는 저자는 역사 변동의 핵심적인 요소들로 토지 제도, 법령, 행정, 소금 전매, 지방 호족과 사대부들의 정권으로부터의 이탈 경향 등의 변천도 비중 있게 다룬다. 왕조 교체의 패턴이 되풀이되는 과정을 서술하면서는 천자 독재 체제의 한계에 대한 탄식과 아쉬움이 짙게 묻어나기도 한다.
‘역사학은 단순한 사실의 집적이 아니고 사실의 논리의 체계여야 한다.’ 저자는 맺음말에서 이 책을 통해 개설서란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보여주려 했다고 썼다. 저자는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사실들만을 자료로 중국통사를 집필했다. 노년의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평생을 연구했던 대상에 대해 갖고 있던 사유의 정수에 기반한 이 책 '중국통사'는 대학자의 역사관과 개성이 잘 드러난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역사가에게는 역사개설이야말로 동시에 역사철학이기도 한’ 것이다.
책 속으로그런데 명군名君에 의해 잘 다스려지는 치세治世가 생기고 암군暗君에 의해 어지러운 난세亂世가 시작하는 것이 역사의 법칙인 것처럼 생각되어 왔지만, 실은 치세란 것은 호경기, 난세란 것은 불경기의 다른 이름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호경기, 불경기는 그때그때의 군주 개인의 정책에 의해 좌우되기가 어려우므로 예전부터의 군주에 대한 전통적인 평가는 그다지 타당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예컨대 청조의 강희제 같은 이는 때로는 불세출의 명군이라고 칭송받기도 하지만 실질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고 극히 보통의 인간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공자가 편찬했다고 하는 『춘추春秋』에 군주를 시해했다는 기사가 36군데나 나온다고 한다. 이로써 춘추라는 시대, 약 250년은 군신 관계가 문란한 시기라고 지적하는 것이 유교의 해석인데, 그것은 그 이전에 군주권이 안정된 이른바 삼대三代[하ㆍ은ㆍ주]의 치세를 상정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춘추 이전의 진정한 역사는 알지 못하므로 실제로는 전보다 좋아졌다고도 나빠졌다고도 단언할 근거가 없다. 명확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시대까지는 아직 군주권이 확립되지 않고 그 친척이나 관료와의 사이에 신분상 큰 차이가 없어 그 지위가 몹시 불안정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 군주권이 차츰 성장하고 있었으므로 주위와 마찰이 생기기 쉬웠고, 이것이 오히려 비극을 야기한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후세에 관료 집단의 통솔자를 재상宰相이라고 부르지만, 재宰란 요리 담당이고 상相이란 주인의 기거를 도와 시중드는 자로서 모두가 노예의 임무이다. 또 역사 사실이 보여주는 바로도 제 환공의 패업을 도운 재상 관중管仲은 일단 환공桓公에게 적대했다가 포로가 된 자이므로 사형수로서 사면받은 노예이다. 또 진秦의 목공穆公을 보좌한 백리해百里亥는 자신을 양 다섯 마리의 대가로 팔았다고 하니 이 또한 노예이다. 훨씬 더 고대의 설화에 나오는 부열傅說은 노예 노동을 하고 있던 처지에서 은의 천자가 발탁해 등용했다고 하는데, 그 성인 부傅는 아이 돌보는 역으로서 이것도 노예의 일이었다. 이로써 보면 먼저 군주의 측근에 노예 무리가 있고, 그중 유능한 자가 정치 고문이 되어 군주를 돕고 군주의 총애를 받아 지위가 높아지고 권력이 강대해지자 몸은 노예이지만 세상에서도 존경심을 갖고 대우하는 지위를 갖게 된다. 그러면 자진해서 그런 무리에 투신하는 자도 나타나 그것이 관료군을 형성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조조의 정책에서 보이듯이 중국 중세 역사의 추이는 이민족 대책과 토지 정책의 전개가 주축이 되어 진행된다. 더욱더 이 두 가지 문제의 이면에 공통된 요소를 탐색하면 그것은 다만 부양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필사적 투쟁이 거기에 있다. 이민족에게도, 빈민에게도 보다 잘 살고자 하는 따위의 한가로운 소망은 없다. 심각한 불경기가 침투한 시대에는 이민족은 이민족대로 식량을 구해 방황하고 빈민은 빈민대로 직업을 찾아 유랑해야만 했다. 그렇다 해도 이처럼 비참한 밑바닥 생활자를 토대로 해서 상류층에는 우아한 귀족 계급이 번영한 것은 어찌 된 일인가. 이것도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다. 계엄령이란 것은 받는 자에게는 도탄의 고통이지만 시행하는 측에는 그만큼 고마운 것도 없다.
왕안석의 신법은 이 밖에도 열거하려면 한이 없을 정도로 여러 방면에서 시행되어 종래의 관례를 개정했다. 이들 신법은 결코 왕안석이 개인의 생각만으로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각 개혁에는 따로 제안자가 있었고 많은 경우 이름을 알 수 없는 민간인이었는데, 경험에서 개량책을 착상해 상언한 것이다. 왕안석은 그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위로는 천자, 아래로는 관료와 상담해 숙고한 끝에 단행했던 것이다. 이것이 왕안석이 정치가로서 걸출한 점이며, 현재에도 정치가라면 정말 피해를 입기 쉬운 하층 인민의 의견을 흡수해 그것을 정치에 유용하게 쓰지 않으면 진정한 정치가가 아니다. 그러므로 왕안석의 신법의 특징은 정부의 형편에 유리한 그런 개혁이 아니라 약자의 이익을 옹호한다는 입장에서 이루어진 개혁이라는 점에 있다.
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 조병한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640쪽 | 25,000원
1492년부터 1914년까지 유럽은 전 세계 영토의 84퍼센트를 정복했지만, 15세기 말까지만해도 유럽은 그 어떤 잣대로 보아도 세계의 중심이 아닌 변방이었다. 그러던 유럽이 근대 들어 흥기하여 세계의 패권을 잡았다. 수백 년간 유럽을 앞서갔으며 강력한 문명을 가졌던 중국인, 일본인, 중동의 오스만인, 남아시아인은 왜 우위를 점령하지 못했을까?
신간 '정복의 조건'은 종래의 요인ㅡ지리적 특성이나 질병, 산업혁명 등ㅡ에서 벗어나, 새로운 유럽 승리의 요인으로 앞선 화약 기술을 제시한다. 유럽은 화약 기술을 토대로 아스텍 제국과 잉카 제국을 무너뜨리고, 인도양에 진출하여 바닷길을 가로막고 통행세를 받아냈으며, 아시아의 요새에서 수적 열세를 극복하는 등 세계 곳곳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경제학의 게임이론을 접목시켜, 근대 초기 유럽에서 통치자들이 어떤 이유로 개전을 결정하고 군사비를 지출했는지 설명한다. 나아가 유럽 통치자들이 화약 기술을 발전시킨 이유와 비유럽 국가들이 뒤처지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토너먼트 모델이라는 경제 모델을 제시하는 등 유럽의 역사를 보는 참신한 시각을 제시한다.
책 속으로자기보다 훨씬 큰 적수, 또는 낮은 비용으로 인력과 자원을 모을 수 있는 적수와 싸우려는 통치자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모델에나 예외가 있듯이, 현실에는 예외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두 통치자의 체급이 다를 때는 평화로 귀결될 공산이 크다.
통치자들은 언제 전쟁을 할까? 토너먼트 모델에 따르면, 몇 가지 조건이 성립할 때 전쟁을 한다. 우선 두 통치자가 자원을 동원할 때 드는 가변비용이 서로 비슷해야 하고, 그들이 싸워서 차지하려는 상의 가치가 재정 제도와 군사 기구를 수립하는 데 드는 고정비용보다 커야 한다. 또한 그들이 통치하는 나라나 경제가 규모 면에서 현저히 다르지 않아야 하며, 차입 능력의 차이가 크지 않아야 한다. 예외가 생길 여지가 조금 있기는 하다. 작은 나라의 통치자가 자금을 쉽게 빌릴 수 있다면, 국내 자원에 의존할 뿐 차입이 불가능한 더 큰 나라의 통치자와 싸울 수 있다. (2장, 43~44쪽)
정치사는 왜 유럽이 정치적으로 쪼개졌는지, 영광과 같은 상들을 차지하고자 끊임없이 싸우는 것이 왜 서유럽 통치자들에게 매력적이었는지, 적어도 그들 중 일부는 어째서 낮은 정치적 비용으로 자원을 동원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바로 그 시기에 군사적으로 유리하고 실행학습을 통해 개선하기에 알맞은 기술이 왜 하필 화약 기술이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 중국, 인도, 러시아, 오스만 제국에서는 왜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지 못했는지도 드러낸다. (4장, 141쪽)
초기 정복자들은 대부분 장군이나 제독이 아닌 민간 모험가였다. 그들은 대체로 군주에게 일종의 연줄을 댔고, 대개 통치자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왕실의 대규모 침공군을 지휘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의 부하들 태반이 노련한 병사였던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화약 기술을 손에 넣었을까? 어떻게 해외에서 권력을 잡고 자원을 갈취할 정도로 화약 기술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유럽의 왕들과 군주들은 막대한 병력을 거느리고도 어째서 민간 모험가들에게 의존했으며, 더 나아가 그들을 격려하기까지 했을까?
이 물음들의 답 또한 정치사에 달려 있으며, 그 답을 찾는다면 서양이 부상하여 세계를 정복한 역사 외에 다른 어떤 시나리오들이 가능했을지 상상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81쪽, 5장)
그렇다면 서유럽 사업가들은 외국으로 가서 정복하도록 독려된 반면에 유라시아 사업가들이 똑같은 일을 시도했을 때 장벽에 부딪힌 이유는 무엇일까? 서유럽에서 그 일이 그토록 쉬웠던 이유는 뭘까? 그리고 나머지 유라시아에서는 그런 일이 불가능하진 않더라도 더 어려웠던 이유는 뭘까? 대체로 이 물음들의 답은 정치사의 결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치사로 인해 유럽 통치자들은 민간의 군사적 진취성에 의존할 확률이 높아졌다. 그들의 의존은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는데, 민간 이익과 외국 정복을 결합하여 세계를 장악할 강력한 유인과 화약 기술을 가일층 혁신할 이유를 유럽인에게 제공했기 때문이다. (5장, 188~1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