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일 오후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백남기 농민 추모대회' 참가자들이 손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노컷뉴스)
고 백남기 농민(1947~2016)의 장례식이 마침내 치러진다. 지난해 11월 14일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경찰의 물대포에 맞고 쓰러진 뒤, 317일째인 지난 9월 25일 눈을 감고도 40여 일 만이다.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지는 장례식은 오늘(5일) 오전 8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발인, 9시 명동성당 장례미사, 오후 2시 광화문 광장 영결식을 거쳐, 이튿날인 6일 고인의 고향인 전남 보성군과 광주 금남로에서의 노제,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하관식으로 이어진다.
고인은 지난 1968년 중앙대에 입학한 뒤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면서 수배로 인한 도피 생활을 반복하던 끝에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81년 고향인 전남 보성으로 귀향했고, 1986년 가입한 가톨릭농민회원으로 평생을 살았다.
그랬기에 더더욱 백남기 농민은 쌀값 폭락 등으로 농민들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었으리라. 약자들의 삶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박근혜 정권의 행태를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으리라. 백남기 농민은 왜 상경투쟁에 나섰을까. 국민에게 등돌린 공권력에 맨몸으로 맞선 그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그 답은 고인의 이같은 삶의 궤적에서 찾아야만 할 것이다.
◇ "백남기 농민의 내면은 '가엾은 리얼리스트'였던 듯하다"
(사진=윤창원 기자/노컷뉴스)
이러한 백남기 농민의 삶은 생전에 고인이 자주 불렀다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의 원작자인 저항시인 김남주(1946~1994)의 삶과 작품을 떠올리게 만든다. 당대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진 군사독재정권의 만행에 치열하게 맞섰던 이들의 경험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고 백남기 농민에 대한 부검을 강행하려는 경찰과, 이를 저지하는 시민들의 대치로 긴박한 분위기가 고조되던 지난달 4일,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는 CBS노컷뉴스에 "농민 백남기와 시인 김남주는 아주 비슷하다"고 전했다.
그는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접하면서 '인텔리 리얼리스트'의 모습을 봤다. '가엾은 리얼리스트'라는 김남주의 시가 있다"며 "고인의 내면은 이렇듯 '가엾은 리얼리스트'였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가 언급한 '가엾은 리얼리스트'를 비롯해 '자유', '춤', '이 가을에 나는', 그리고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까지 시인 김남주의 작품을 통해 고인의 삶을 되돌아본다. 백남기 농민의 마지막 가는 길에 부치는 시인 김남주의 '진혼가'다.
농민 백남기에 부치는 시인 김남주의 '진혼가' |
가엾은 리얼리스트
시골길이 처음이라는 내 친구는/ 흔해빠진 아카시아 향기에도 넋을 잃고/ 촌뜨기 시인인 내 눈은/ 꽃그늘에 그늘진 농부의 주름살을 본다/ 바닷가가 처음이라는 내 친구는/ 낙조의 파도에 사로잡혀 몸둘 바를 모르고/ 농부의 자식인 내 가슴은 제방 이쪽/ 가뭄에 오그라든 나락잎에서 애를 태운다/ 뿌리가 다르고 지향하는 바가 다른/ 가난한 시대의 가엾은 리얼리스트/ 나는 어쩔 수 없는 놈인가 구차한 삶을 떠나/ 밤별이 곱다고 노래할 수 없는 놈인가
자유
만인을 위해 내가 노력할 때/ 나는 자유이다/ 땀 흘려 힘껏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이다/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밖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이 가을에 나는
이 가을에 나는/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오라에 묶여 손목이 사슬에 묶여/ 또 다른 감옥으로 압송되어 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번에는/ 전주 옥일까 대구 옥일까 아니면 대전 옥일까/ 나를 태운 압송차가/ 낯익은 거리 산과 강을 끼고/ 들판 가운데를 달린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따가운 햇살을 등에 받으며 저만큼에서/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숫돌에 낫을 갈아 벼를 베고 있는/ 아버지의 논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나도 여기서/ 차에서 내려/ 아이들이 염소에게 뿔싸움을 시키고 있는/ 저 방죽가로 가고 싶다/ 가서 나도 그들과 함께 일하고 놀고 싶다/ 이 허리 이 손목에서 사슬을 풀고 오라 풀고/ 발목이 시도록 들길을 걷고 싶다/ 가다가 숨이 차면 아픈 다리 쉬었다 가고/ 가다가 목이 마르면 샘물에 갈증을 적시고/ 가다가 가다가 배라도 고프면/ 하늘로 웃자란 하얀 무를 뽑아 먹고/ 날 저물어 지치면 귀소의 새를 따라/ 나도 집으로 가고 싶다 나의 집으로/ 그러나 나를 태운 압송차는 멈춰 주지를 않는다/ 강을 건너 내를 끼고 땅거미가 내리는/ 산기슭을 달린다/ 강 건너 마을에는 저녁밥을 짓고 있는/ 연기가 하얗게 피어오르고/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이 가을에 나는/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춤
흑산도라 검은 섬 암벽에 부서지는 하얀 파도 없다면/ 남해바다 너 무엇에 쓰랴/ 전라도라 황토길 천군만마 휘날리는 말발굽 소리 없다면/ 황산벌 너 무엇에 쓰랴/ 무엇에 쓰랴/ 천으로 만으로 터진 아우성 소리 없다면/ 이 거리 이 젊음 무엇에 쓰랴/ 살아라 형제여 한 번 살아봐라/ 한 번 죽어 골백번 영원으로 살아라/ 창대 빛 죽창에 미쳐 광화문 네거리 우두두 떨어지는/ 녹두꽃 햇살에 미쳐/ 사월의 자유에 미쳐// 살아라 형제여 한 번 살아봐라/ 한 번 죽어 골백번 영원으로 살아라/ 창대 빛 죽창에 미쳐 광화문 네거리 우두두 떨어지는/ 녹두꽃 햇살에 미쳐/ 사월의 자유에 미쳐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앞서 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둘이면 둘 셋이면 셋 어깨동무하고 가자/ 투쟁 속에 동지 모아 손을 맞잡고 가자/ 열이면 열 천이면 천 생사를 같이 하자/ 둘이라도 떨어져서 가지 말자/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 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 주자/ 고개 너머 마을에서 목마르면 쉬었다 가자/ 서산 낙일 해 떨어진다 어서 가자 이 길을/ 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 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 주고/ 산 넘고 물 건너 언젠가는 가야 할 길/ 시련의 길 하얀 길/ 가로질러 들판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길 하얀 길/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