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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의 맛] "식당은 철창 없는 감옥" 그러나 행복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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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부대찌개 전문점 '오뎅식당' - 김민우 사장

외식시장의 전설로 불리는 사장님들이 들려주는 '장사의 철학', 그들의 이야기가 "장사나 해 볼까?" 생각하는 창업 꿈나무들과 장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700만 자영업자들에게 장사의 대한 마음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칼럼을 시작한다. [편집자 주]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나는 토속적인 입맛을 가진 사람이다. 치맥(치킨+맥주)도 좋지만 파전에 막걸리, 삼합에 소주에 더 열광한다. 누가 먹자 소리를 안 하면 치킨, 햄버거, 피자 같은 음식이 별로 당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나도 좋아하는 음식이 있는데 햄과 소시지다. 둘 중 하나를 굳이 선택해야 한다면 소시지.

소시지를 향한 판타지는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198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나에게 가장 좋은 반찬은 두말할 것도 없이 소시지였다. 주황색 몽둥이 소시지가 소시지의 전부인 줄 알았던 어느 날, 좀 사는 집 친구가 도시락 반찬으로 줄줄이 엮인 비엔나 소시지를 싸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시지다운 소시지를 먹는 순간이었다. 한 입 베어 문 순간, 나는 이렇게 외쳤다.

"이것이 진정 지상의 음식이란 말입니까?"

향과 맛이 어쩌면 그렇게 매혹적인지 평생 그것만 먹고 살래도 좋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도 나는 소시지를 좋아하며 소시지가 잔뜩 들어간 부대찌개를 엄청 애정한다.

부대찌개를 두고 한 전통음식 연구가는 '국적 불명의 경박한 음식'이라고 평가한 적도 있다. 그 분 생각도 존중한다. 그는 전통음식 연구가가 아닌가. 충분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다만 나는, 음식이 역사이자 정서이자 추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우리 음식이 아니라고 해도 100년을 대중들이 먹어왔다면 최소한 존중받아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가 외국 문화를 부대찌개만큼만 한국화 시킬 수 있다면 어떤 것이 밀려 들어와도 두렵지 않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 오뎅식당은 오뎅을 팔지 않는다

'오뎅식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퓨전음식이라 불리는 부대찌개를 처음 세상에 내놓은 곳이다. 그런데 부대찌개 전문점 이름이 왜 '오뎅식당'일까? 찌개에선 오뎅을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데. 아, 밑반찬으로 어묵이 나온다. 물론 그래서는 아니다.

부대찌개 집을 '오뎅식당'이라고 부른 이유는 부대찌개란 음식을 감추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부대고기는 물론이고 양담배만 펴도 잡혀가던 시절이라 부대에서 나오는 식자재를 쓴다는 건 불법이었던 것이다. 부대찌개가 그렇듯, '오뎅식당'이란 이름 역시 아픈 우리 역사의 한 토막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부대찌개란 이름을 처음 만든 이는 오뎅식당 창업주 고 허기숙 할머니다. '오뎅식당'을 하기 전 할머니는 안 해 본 일이 없으셨다. 군고구마 장사도 했고 냉면도 팔았다. 그러다 노상 포장마차를 했는데- 그 시절 오뎅도 같이 팔았는데 부대찌개란 이름을 쓸 수 없던 시절 그걸 숨기기 위해 오뎅식당이라는 이름을 썼다고 한다- 군부대가 많은 의정부에는 당시 미군들이 먹고 남은 부대고기를 배춤에 몰래 숨겨와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걸로 부대고기볶음을 한 것이 부대찌개의 시작이었다.

안주로 부대고기볶음을 먹던 손님들은 밥하고 먹을 수 있게 국물을 더 많이 잡아달라고 했다. 역시 한국인에겐 볶음보다는 국물요리가 갑이다. 그래서 김치도 넣고 햄과 소시지도 넣고 고추장으로 칼칼하게 맛을 낸 게 지금의 부대찌개다.

하지만 부대고기 때문에 겪은 우여곡절도 많았다. 당시 부대 식재료는 외부로의 반출이 엄격하게 금지돼 있었다. 그래서 세관과 경찰서에서 수시로 검문을 나왔다. 감춰놓은 부대고기를 들켜 경찰서로 연행돼 차가운 유치장에서 밤을 지내기도 했다. 벌금을 왕창 물고 일수 돈을 얻어서 다시 장사하기를 여러 번. 그런 생활이 지긋지긋해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지만 "부대찌개를 먹으면 행복해하는 손님들 때문에 그만둘 수 없었다"고 과거 허인숙 할머니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손자인 김민우 사장에게 같은 질문을 했더니,

"할머니는 리어카로 안 해 본 일이 없지만, 그래도 이게 제일 낫다고 하셨어요."

더불어 수입도 짭짤하셨다는 말씀!

단속이 풀린 건 1988년 88올림픽을 기점으로 소고기 수입이 허용되면서부터다. 부대찌개가 공식적으로 세상에 선보일 수 있게 되면서 '오뎅식당'은 입소문을 탔고, 전국적인 명물로 떠올랐다.

◇ 무조건 부지런해야 한다

'오뎅식당' 김민우 사장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오뎅식당'부대찌개 맛의 비밀은 갖가지 야채로 만든 맑은 육수와 양념장에 있다. 며느리도 모르는 그 맛의 비밀은 세상에 딱 한 사람, 김민우 사장만 알고 있다. 허기숙 할머니는 손자인 김민우 사장에게만 전수해줬다고 한다. 가게 식자재를 책임지는 그의 아버지도 김민우 사장의 형도 그 비법을 모른다.

할머니는 왜 비법을 둘째 손자에게 전수하셨을까? 아들 내외와 함께 살던 할머니는 유독 둘째 손자와 손발이 잘 맞았다.

"저랑 할머니는 참 잘 맞았어요.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까지 같았습니다. 할머니는 제가 장사랑 제일 잘 맞는다고 생각하셨던 거 같아요."

아주 어릴 때부터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내 장사는 민우가 해야 한다. 그렇게들 알아라"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주말이나 휴일에는 할머니의 호출이 떨어졌다. 대학생이 돼서는 친구들처럼 카페 같은 데서 아르바이트를 해보고 싶었지만 할머니는 다른 일은 생각도 말라고 못 박으셨다. 그리고 군 제대 이후 본격적으로 가게 일에 뛰어들었다.

그에겐 다른 꿈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형사가 되고 싶었어요.(웃음)"

의경으로 입대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 제대하면 바로 경찰시험을 봐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어느새 가게 일을 하고 있었다는 김민우 사장.

"어릴 때부터 가게는 제가 해야 한다는 말을 하도 들어서 세뇌가 됐나 봐요(웃음). 가게 일을 돕다보니 그냥 자연스럽게 이렇게 됐네요."

과거 허기숙 할머니가 이런 인터뷰를 한 걸 본 적이 있다.

"경찰 된다는 걸 내가 부추겼어. 나하고 이거 하는 게 더 낫다고. 우리 손자가 부지런하고 머리도 좋아서 잘할 거야."

김민우 사장이 가게를 이어받기 전 가장 먼저 한 일은 전국의 내놓으라 하는 부대찌개 집을 순회한 것이다. '오뎅식당'부대찌개의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때 알았죠. 할머니 부대찌개가 전국 최고라는 걸!"

김민우 사장이 본격적으로 가게를 이어받으면서 많은 변화가 생겼다.

"예전에는 소비자 입장에서 조금 불편한 식당이었어요."

직원들 나이가 많다보니 서빙도 유연하지 못했고 젊은 손님들은 어르신 직원에게 뭔가를 요구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 게 좋아서 오는 손님들도 있었지만 대다수 손님들은 불편해 했다.

나이든 직원을 젊은 직원으로 교체하는 과정에서 할머니와의 갈등도 있었다. 하지만 손님들 반응이 좋은데다 매출도 오르자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 니 판단이 맞는 거였어. 앞으로는 전적으로 니 말을 따르마."

부대찌개에 넣어 먹는 사리도 라면 하나뿐이었는데 젊은 층을 위해 베이컨과 치즈떡을 추가시켰다. 이후 매출이 눈에 띄게 늘어서 할머니가 무척 좋아하셨다.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아' 스스로 만족하셨을 터. 이후 손자의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하셨다고 한다. 음식 간도 늘 손자에게 보게 했고 '부대찌개 맛을 제일 잘 아는 건 우리 손자'라고 공공연하게 말씀하셨다. 직원들에게도 "앞으로 모든 건 손자 말대로 하겠다"면서 힘을 실어주시기도 했다.

할머니는 늘 '부지런해야 된다. 특히 손님한테 잘해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셨다.

"맛도 맛이지만 할머니처럼 손님 한 분 한 분에게 정성을 들이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저도 흉내는 내고 있지만, 할머니처럼은 힘들어요. 아마. 평생 힘들 겁니다."

할머니는 진정 음식 만드는 일과 손님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모양이다.

"이젠 좀 쉬시라고 해도 가게를 떠나 보신 적이 없어요. 우여곡절 끝에 모시고 나가도 빨리 가게 들어갈 생각만 하셨죠. 비행기도 한 번 못 타 보시고 제주도도 한 번 못 가보시고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아픕니다."

살아있는 날까지 식당에서 부대찌개를 팔 거라고 하셨던 할머니는 그 소망을 이루고
2014년 6월 먼 길을 떠나셨다.

◇ 식당에 인생을 저당 잡힌 삶

김민우 사장의 삶은 할머니와 다를까? 저녁이 있는 삶, 주말이 있는 삶, 여행을 즐기는 삶은 살고 있는가?

"이상하게 저도 못 쉬네요.(웃음) 지난 7년 간 결혼식 날 딱 하루 쉬었습니다."

20대 부부가 일이 너무 바빠서 신혼여행도 못 갔다니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신부가 서운해 할 만도 하다. 그런 마음을 충분히 드러낸다고 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서운해 하지 않더라고요. 적응이 돼서 그런지..(웃음)"

언젠가 기회가 되면 물어보고 싶다. 진정 서운하지 않았는지. 자녀가 둘인 김민우 사장은 큰애가 올해 여섯 살인데도 같이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다. 아기 돌잔치마저 식당에서 했을 정도다. 아빠랑 같이 동물원 놀이동산 가는 일은 명물 가게 사장의 아이들에게는 언감생심인 모양이다-큰 애가 어린이집에 들어간 이후 '아빠랑 체험 학습' 숙제가 있어서 놀이공원에 하루 다녀왔다고 한다-1년 365일 연중무휴 문을 여는 '오뎅 식당'의 주인은 앞으로 며칠이나 쉬게 될까?

평생을 여행 한번 못가고 식당을 지키신 할머니가 늘 안타까웠지만 손자 역시 할머니와 다를 바 없는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당 일이 즐겁고 대를 이은 것에 후회가 없다는 김민우 사장. 역시 할머니의 눈은 정확했다.

소위, 대를 잇는 식당, 명물이 된 가게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가 식당 주인들은 대부분 자신의 인생을 가게에 저당 잡힌다는 것이다. 1년 365일 식당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철창 없는 감옥이 따로 없다. 돈을 벌어도 쓸 시간이 없으니 크게 욕심도 내지 않는다.

그런데 경이로운 건 그들 대부분이 그것을 마다하지 않으며 흔쾌히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허기숙 할머니와 김민우 사장처럼. 식당은 자신을 온전히 내던져야만 성공할 수 있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몸고생 마음고생 하지 말고 과감히 포기하기를 권한다.

◇ 욕심 내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김민우 사장의 하루는 가게에 나와 육수를 만드는 일로 시작된다. 식자재 재고파악도 직접 한다. 인스턴트식품이지만 햄도 캔에서 뜯어서 바로 끓여야 더 맛있다. 무슨 음식이든 시간이 흐르면 물이 빠지고 마르기 마련.

"뜯은 햄을 그날 다 소비하지 못하면 다음날 아침 직원들이 다 먹어야 합니다.(웃음)"

아. 나도 '오뎅식당'에서 일하고 싶다.

김민우 사장이 제일 신경 쓰는 식자재는 김치다. 1년에 본점에서만 2만 5천포기를 쓴다. 속초 지역 민통선에서 자라는 해풍 맞은 배추만 고집하고 해양심층수로 배추를 절인다.

"같은 햄을 쓴다고 해도 김치만큼은 어디서도 흉내 내지 못할 겁니다."

그만큼 김치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다.

현재(2016년) '오뎅식당'은 본점과 직영점 2개가 운영 중이다. 가맹 문의가 빗발친 지 오래지만 가맹점은 아예 생각도 안한다.

"욕심 내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선 안에서 하라고 하신 할머니 뜻을 따르고 싶어요. 돈 보다 할머니가 지켜 온 맛을 저 역시 지키고 싶고요,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라 찾아가서 먹는 그런 음식을 만들고 싶습니다."

'오뎅식당'은 60여년간 단일 메뉴로 최고의 명성을 이어왔다. 역사만 길다고 명물이 되는 건 아니다. 거기엔 사람들의 절대적인 애정을 필요로 한다.

다른 유수의 노포와 달리, '오뎅식당'은 해가 갈수록 손님이 늘어나고 있다. 부대찌개라는 음식의 특성상 앞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더 많아질 것이다. 아픈 역사를 안고 태어났지만 강하게 성장한 부대찌개는 우리를 기쁘게 한다. 전통의 맛과 트렌드의 균형을 잘 잡아 준다면 부대찌개는 앞으로 100년 200년도 거뜬할 거라고 믿는다. 김민우 사장이라면 믿을 만하다.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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