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출간된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장관의 회고록이 '제 2의 NLL 대화록 사건'으로 비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 2007년 11월 유엔의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과정에서 노무현 정부가 북한에 사전의견을 구한 뒤 기권했다는 송 전 장관의 회고록 내용에 대해 새누리당이 '북한과 내통한 국기문란 사건'이라며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면서다.
송 전 장관은 최근 펴낸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에서 "2007년 11월 유엔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에 앞서 노 전 대통령 주재로 열린 수뇌부 회의에서 남북 채널을 통해 북한의 의견을 물어보자는 김만복 당시 국가정보원장의 견해를 문재인 당시 실장이 수용했으며, 결국 우리 정부는 북한의 뜻을 존중해 기권했다"고 주장했다.
◇ 새누리당 "국기문란 사건", 문재인 "치열한 내부토론 통해 결정"
이에 새누리당은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던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개입한 '대북결재 요청 사건'이라며 당내 태스크포스(TF)를 발족하는 등 공세에 나섰다.
이정현 대표는 15일 기자들과 만나 "그 많은 국방 예산을 쓰고, 젊은이들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기에 시간을 들이고,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는데, 그 적들(북한)하고 내통해서 이런 식으로 한 것"이라며 문 전 대표를 '적과 내통한 장본인'으로까지 몰아세웠다.
그는 "이처럼 '상식이 없는 짓'을 한 사람들이 대선에 출마해 다시 그 방식을 이어가겠다는 것 자체가 더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당시 대통령기록물을 열람해 사실관계를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문재인 전 대표는 이날 두 차례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치열한 내부 토론을 거쳐 노무현 대통령이 다수의견에 따라 기권을 결정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문 전 대표는 당시 상황을 소개하면서 "당시 정상회담 후 남북총리회담과 국방장관회담 등 다양한 대화가 진행되고 있을 때"라면서 "정상회담 직후라는 시기적 특성 속에서 북한인권결의안에 대해 '찬성 → 국제공조 → '북한 개선 유도'라는 전략과 '기권' → 한국의 주도성 확장 → 북한/미국 설득이라는 두 가지 전략을 두고 정부 내에서 치열한 토론을 했던 시기"라고 설명했다.
그는 "외교부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계속 찬성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통일부는 당연히 기권하자는 입장이었는데, 이번엔 대부분 통일부의 의견을 지지했다. 심지어 국정원까지도 통일부와 같은 입장이었다"며 "노 대통령은 양측의 의견을 충분히 들은 후 다수의 의견에 따라 기권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노 대통령은 항상 내부에서 찬반을 놓고 치열한 토론을 거쳤으며 시스템을 무시하고 사적인 채널에서 결정하는 일은 없었다. 박근혜 정부는 노무현 정부를 배우기 바란다"고 일침을 가했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도 "어이없게도 무슨 경상도 어머님들 말씀대로 '날아가는 방귀를 잡고 시비하느냐'는 식으로 개인 회고록을 붙잡고 국정조사를 하자고 한다"고 비판했다.
◇ 당시 김만복 국정원장 "북한 반응 제의한 사실 없다. 사리에 맞지도 않다"그러나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당사자들은 송민순 전 장관의 주장을 전면 부인했다.
김만복 전 국정원장은 CBS 노컷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당시 (유엔인권결의안과 관련한)회의가 두 차례 있었는데 노무현 대통령 주재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고 안보정책조정회의에만 참석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자신이 '북한의 의견을 물어보자고 했다'는 송 전 장관 주장에 대해 "사리에 맞지 않는 얘기다. 북한의 대답이 뻔할텐데 뭣하러 물어보겠느냐"고 일축했다.
김 전 원장은 "회의에서 그런 제의를 한 사실이 없고 따라서 북한에 의견을 물어본 사실도 없다"며 "송 전 장관이 왜 그런 주장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시 통일부장관이었던 이재정 경기도교육감도 통화에서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북한의 답변이 뻔할텐데 우리가 초등학생도 아니고 뭣하러 물어보겠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다만 문재인 전 대표는 페이스북에서 "외교부는 외교부대로, 국정원은 국정원대로 북한의 반응을 점검하거나 정보를 수집했다면, 그야말로 참여정부의 높은 외교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국정원이 북한 반응을 '점검'했을 가능성은 열어뒀다 .
◇ 당시 남북관계 상황을 현 상황에 비춰 재단해선 안돼송민순 전 장관과 새누리당이 주장하는 문제의 핵심은 사전에 북한의 의견을 물어보고 유엔인권결의안 표결에 기권을 했다는 거지만 당시 상황을 현재의 극단적 남북대치 상황에 비춰 재단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이 많다.
2007년 11월은 한달전인 10월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간 2차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진 직후로, 당시 남북간에는 '10.4 남북정상선언'에 따른 후속조치가 진행중인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문제의 안보정책조정회의가 열린 11월 18일 전인 14~16일 서울에서 한덕수 총리와 김영일 내각총리간 남북총리급 회담이 열려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이행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하는 등 남북관계가 순풍을 타고 있었다.
또 같은 달 27~29일 평양에서 2차 국방장관 회담, 12월 2~4일 서울에서 부총리급 경제협력공동위원회 회의가 예정되는 등 10.4 남북정상선언에서 합의한 남북경제협력 및 서해평화협력을 위한 현안들을 조율해 나가던 시기였다.
남북 정상들이 만나 이뤄낸 화해협력 기조를 저해하면서까지 유엔인권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진다는 것은 당시로선 선택하기 어려웠던 카드였다는 얘기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는 그 이전에 단 한차례만 북한 유엔인권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었다.
북한 인권 결의안이 유엔인권위원회에 처음 상정된 2003년에는 불참, 2004년과 2005년에는 기권했고 2006년 12월에는 7월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와 10월 1차 핵실험으로 남북관계가 얼어붙으면서 결의안에 찬성했었다.
문재인 전 대표도 이와 관련해 "그 해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실험을 했던 2006년)여당도 기권 의견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그러나 노 대통령은 외교부의 주장을 받아들여 찬성 결정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총리급 장관급 회담이 남북을 오가며 열리고 있는 상황에서 결의안 기권방침을 북한에 사전통보하고 반응을 살피는 것은 당연한 조치라는 시각도 있다.
2006년을 제외한 전례에 비춰 북한 인권결의안에 기권한다는게 남북관계를 반영한 자연스러운 결정으로 정부의 새로운 입장이거나 바뀐 입장도 아닌데 사전에 북한의 반응을 살핀 것을 마치 북한의 재가를 받은 것처럼 왜곡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통일부장관 정책보좌관을 지낸 김연철 전 인제대 교수는 페이스북 글에서 "당시 북한에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고 불쑥 유엔에서 인권결의안에 찬성한다는 것이 이해가 가겠느냐"며 "사전통보를 하고 북한의 반응을 살필 필요가 있었다.(송 전 장관이) 아무리 감정의 앙금이 남았어도 '북한에 물어보고 결정했다'고 그렇게 쓰면 안된다"고 뼈있는 지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