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홍성욱의 STS, 과학을 경청하다'. 저자는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개념을 확장, 발전시킨 개념으로 '네트워크'로 제시한다. 네트워크는 현대과학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개념이며, 과학적 이슈의 흐름을 설명하는 열쇠이다.
네트워크는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뻗어나가는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성장하던 네트워크가 소멸되거나 다른 네트워크로 대체되기도 하고, 여러 네트워크가 하나로 응축되기도 한다.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네트워크의 관점으로 볼 때, 과학이 사회와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임을 알 수 있다. 또, 과학이 자연 본연의 속성이라기보다 ‘인간’의 활동임을 직시할 수 있다.
STS는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즉 ‘과학기술학’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는 과학의 발전이 과학기술의 발전을 낳는다고 여겨지지만, 과학기술학의 관점에서 볼 때 과학기술이야말로 과학의 핵심이다.
일례로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발명된 증기기관이라는 기술이 근대 열역학의 발전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더 나아가 과학기술학의 시각은 과학의 발전 과정을 단순한 지식의 진보가 아니라, 사회적 현상으로서 ‘살아 움직여온’ 역사로 보도록 이끈다. 이에 따라, STS를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즉 ‘과학기술과 사회’로 그 외연을 넓혀보고자 하는 것이 책의 목적이다.
예를 들어, 다윈의 진화론은 여러 과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만들어졌으며 당시의 월리스의 진화론, 라마르크의 진화론 등과 경쟁해야 했다. 그의 ‘생존경쟁’ 이론은 러시아, 독일, 프랑스 생물학자들로부터 수없이 많은 비판을 받았다. 17세기부터 유럽에서 발전한 자연사 분야를 바탕으로 진화론의 중요성과 설득력이 증명되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함께 등장한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 역시 다윈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에 의해 논쟁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서양과 같은 과학 전통이 부재했던 한국 등의 동아시아 국가들에서는 다윈의 진화론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며, 사회진화론도 별다른 논쟁 없이 다윈의 진화론과 같은 맥락으로 수용해버렸다.
서양의 과학계에서는 다윈의 진화론을 비롯해 뉴턴의 광학 및 중력법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등이 받아들여지기까지 ‘지지고 볶는’ 과정을 겪어야 했다. 이런 과정은 ‘사회문화적’ 과정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과학의 이런 지그재그식 발전 과정이 빠진 채, 완성된 과학이 수입되어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과학이 눈물겨울 정도로 절대적이라고 믿으며, 이미 완성된 진리이자 힘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시각은 과학을 하나의 사회적 활동이 아닌 경제 성장의 토대로만 여기게 하며, 과학자 및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참여를 방해하고 과학-사회의 벽을 견고히 할 뿐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과학이 완성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미국이 내놓는 과학의 결과를 그냥 가지고 오면 된다.” 자연의 진리는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인간과 비인간(nonhuman)의 살아 있는 네트워크를 만드는 활동이고 이 네트워크는 국소적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 적합한 과학을 만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 나온 논문은 가져올 수 있지만, 실험실을 가져오는 것은 힘들고, 과학자의 머리에 든 노하우와 같은 암묵지(暗默知)를 가지고 오는 것은 더욱 힘들며, 미국 과학의 네트워크를 가지고 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홍성욱 교수가 말하는 네트워크는 인간과 인간 사이뿐만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연결망까지도 포함한다. ‘비인간’이란 인간이 아닌 존재 전부를 총칭하는 말로, 기술, 자연물, 동식물, 논문 등 여러 유형을 포함한다. 이중에서도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대표적인 비인간이 바로 ‘기술’이며, 따라서 기술이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파악하는 것이 과학과 과학기술을 이해하는 데에 핵심적이다.
비인간들은 인간이 만들고 연구하는 대상이지만, 역으로 다시 인간에게 기술적·도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20세기 초 뉴욕의 건축가 로버트 모지스는 존스 비치 공원을 설계하면서 흑인들이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공원으로 들어오는 도로 위의 구름다리를 낮게 설계했다. 흑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버스의 차체가 높은 것을 이용해서 흑인들이 공원으로 들어오는 교통수단을 ‘기술’로써 통제한 것이다. 결국 공원은 백인들만의 공간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기술과 인공물 같은 비인간이 한 사회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담을 뿐만 아니라 이를 강화하는 역할도 가질 수 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점에서 비인간은 인간의 하위 개념이 아니라 인간과 동등한 지위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또, 비인간들은 실제 세상으로 나오면서 여러 예상치 못한 문제를 만들기도 한다. 실제로 로버트 모지스가 설계한 구름다리도 몇십 년 뒤 엉뚱한 문제를 일으켰다. 높이가 너무 낮게 설계된 탓에, 컨테이너 트럭과 같이 차체가 높은 차량이 지나가기에 아슬아슬해진 것이다. 심지어 컨테이너 트럭이 전복되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문제 해결을 위해 도입된 비인간이 다른 문제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이런 문제들은 과학자나 기술자가 비인간을 연구하는 과정에서는 예상하기 힘들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이 만들고 가공한 비인간들을 끊임없이 돌봐야 하며, 일종의 책임을 져야 한다. 이에 대해 지속적인 사회적 담론이 형성될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은 사회의 필요를 기점으로 만들어지지만 실제 사회에 적용되며 예상치 못한 문제를 만들게 되고, 이는 사회의 법적·윤리적 논의와 새로운 과학기술의 만남으로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과학과 사회가 함께 공유하는 영역이 있기에 사회와 과학의 끊임없는 소통이 요구된다.
책 속으로 고속도로 커브길에서 차가 막혀서 정차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오던 운전자는 커브길 때문에 도로가 막혀 있는 상황을 볼 수 없었습니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정차하고 있던 내 차를 들이받게 되었습니다. 나는 괜찮았는데 내 차가 밀리면서, 갓길에 차를 세우고 나와 있던 운전자를 쳐서 크게 다치게 했습니다. 누구의 책임일까요?
앞에서 인간-비인간의 네트워크를 생각하면 순수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라는 존재를 생각하기 쉽지 않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다른 인간이나 비인간의 존재는 항상 나의 자유를 확대하거나 제한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만든 인터넷 때문에 더 자유롭게 내 의견을 표출할 수 있지만, 더 많은 시선과 감시에 노출됩니다. 법 때문에 내 언론의 자유가 신장되었지만, 내 자유로운 욕망에 반하는 법도 지켜야 합니다. 비인간이 내게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내 손에 총이 쥐어지면 나는 맨손으로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운전대만 잡아도 성격이 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인간, 비인간들과 밀접하게 얽혀 있는 내가, 대체 나의 의지에 따르는 순수한 자유를 얼마나 가질 수 있을까요?
/ 381쪽
1703년에 왕립학회의 회장이 되고 1704년에 『광학』을 출판한 뒤에, 뉴턴은 자신의 이론을 다시 강력하게 옹호합니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결정적 실험’을 반복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결과를 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실험에 사용한 프리즘이 엉터리이기 때문에 잘못된 결과가 나오는 것이라고 반박하도록 했습니다. 이탈리아의 뉴턴주의자였던 만프레디는 “우리가 영국에서 받은 프리즘처럼, 프리즘이 전적으로 완벽할 때에는 결과가 항상 (뉴턴주의) 원칙과 일치하는 것으로 나온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논쟁 끝에 뉴턴의 이론에 반대하는 광학이론, 색깔이론은 잠잠해졌고, 18세기의 100년은 (물론 예외는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뉴턴의 광학이론이 지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과학기술학은 뉴턴의 광학이론과 실험이 제시되고 서서히 자리 잡은 과정을 사회문화적 과정으로 봅니다. 광학에서의 뉴턴의 권위는 뉴턴의 실험의 권위가 세워지면서 확실해졌고, 이를 위해서 뉴턴과 다른 실험 결과를 낸 사람들의 실험은 엉터리 프리즘을 사용한 미숙한 실험으로 평가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 409-140쪽
홍성욱 지음 | 동아시아 | 448쪽 | 1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