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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히 "침묵 역시 알파벳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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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

 

"이제 정말로 독자는 생빅토르의 위그가 1128년에 말했던 그대로 말할 수 있다. “Trimodium est lectionis genus: docentis, discentis vel per se inspicientis.”(내가 네게 [소리를 내어] 읽어줄 수 있고, 네가 내게 [소리를 내어] 읽어줄 수 있고, 내가 나 자신에게 명상적으로 읽어줄 수 있다.) 이제 교사가 하는 활동으로서의 읽기, 다시 말해 소리를 내어 읽기와 듣는 활동으로서의 읽기는 제3의 소리 없는 유형의 읽기로 보완된다. 그것은 곧 책을 명상하며 읽는 것이다." _83쪽


이반 일리치의 후기 사상을 보여주는 대표작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얼마 전 나온 '텍스트의 포도밭'의 모태가 되는 저작이다. 지식의 양식으로서 말과 글이 지닌 영향력에 관해 배리 샌더스와 나눈 대화가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1988)라는 책이 됐고, 이후 이 책 속 "읽기의 궁극적 형태는 '글월(text)을 묵상하는 것'이다"라는 위그의 말이 실마리가 되어 '텍스트의 포도밭'(1993)이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고전학자 이반 일리치를 보게 된다. 다급한 현안들에 대한 비판보다 인간 개개인의 내면 탐색에 치중한다. 이것이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의 문을 닫고 벗들과 책 읽고 묵상하고 대화 나누며 살던 1980년대 후반의 일리치다. 구체적인 개별 현안에 몰두하던 면모는 근원적인 방식으로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전까지 일리치에게서 학교, 병원, 운송수단 등 제도화된 사회의 폐해를 경고하는 선지자적 외침이 컸다면 이제는 이 사회를 만든 우리의 안쪽, 나이테의 중심을 향한 운동이 돋보인다. 12세기 스콜라철학의 거장 생빅토르의 위그가 말한 렉티오 디비나(거룩한 독서)의 열망이 동반된 이 여정은 구술의 상실, 시각적 책의 탄생, 번역과 토박이말의 분화, 문법의 힘, 자기(the self)와 자서전의 발명, 반문맹 문자의 구속, 인공어 새말의 폭력 등 귀 중심에서 눈 중심으로의 변화를 다양한 예를 들어 탐색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러면 상상도 못할 만큼 멀리 떠밀려와, 방대한 정보의 세계에 갇힌 우리는 어떻게 참뜻에 닿을 수 있을까? 여정의 끝자락에서 이들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을 담담히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말없이 나누는 '우리'와 '침묵'이 그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일리치와 샌더스는 이 책의 후기에서 서양 문화에 일반적인 '나'라는 인칭대명사를 묵상한다. 이들은 영어의 '우리'가 아무것도 뜻하지 않게 됐다고 반성하고, 서양의 '나'라는 인칭대명사, 1인칭 단수가 담고 있는 의미론적 지평이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끝없이 환기시킨다. '나'라는 인칭대명사에 1인칭 복수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문화권이 여전히 많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면서 침묵의 역사를 되찾고자 한다.

"낱말과 마찬가지로 침묵 역시 알파벳의 산물이다. 침묵이 문자화되면서 '나' 그리고 분석적인 우리의 새로운 고독이 생겨났다. 지금 우리는 소통에 의지하여 존재하게 된 글월 속의 한 줄이다. 낱말 앞에 오는 침묵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어떤 양식이 자리잡기 이전의 혼란한 잡음 속 메시지가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글월 이전 구술 시대의 우리, 양심 속에서 이어온 민속적 우리는 현실로부터 사라졌다. 우리는 민속적 우리가 분석한 우리로 바뀌는 과정에 침묵의 역사가 개입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182쪽)

책 속으로

중세기에는 맹세뿐 아니라 이전에 구술의 지배를 받던 일상생활의 폭넓은 영역까지도 새로운 종류의 형식적, 법적 문자문화의 지배를 받게 됐다. 이 시기에 인구 중 많은 사람이 사물을 소유하거나 권리를 행사하기 이전에 그것을 묘사해 양피지에 보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뢰가 말로 하는 약속에서 인장이 찍힌 문서로 옮겨간 것이다. _65쪽

생명의 책이 그리스도교의 설교에서 중요해진 저 시기에, 글을 쓴다는 것은 펜을 쥐고 양피지에 문자를 그려넣는다는 뜻이 아니었다. 글을 쓴다는 것이 무슨 뜻이었는지는 베르나르의 필사실 구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12세기 초 클레르보 수도원의 원장이던 베르나르는 자신의 손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 키케로처럼 수도원장은 필경사를 두고 또박또박 명확히 들리도록 말하며 받아적게 했다. _75쪽

12세기를 거치는 동안 문자로 적힌 글월은 공간 속에서 서로 관계를 맺으며 시각적으로 고정됐다. 시각적으로 고정된 글월에서 특정 요소는 돌출되게 했다. _81쪽

이제 세계는 묘사된 모습으로 독자의 눈앞에 놓여 있다. 책은 이제 임의로 접근이 가능해졌다. 독자는 색인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든 마음대로 그곳을 찾아갈 수 있다. 글로 적힌 내용을 독자는 눈으로 보며, 이때의 시각화 과정을 삽화가 도와준다. 독자의 전거는 스승이 아니라 저자로 인식된다. ‘그 자신이 말했다ipse dixit’는 이제 ‘그 자신이 썼다ipse scripsit’로 바뀌었다. (…) 13세기 말에 이르렀을 때 파리의 학생들은 대출이 가능한 도서관에서 필사본을 빌려 수업시간에 스승과 함께 읽을 수 있었다. _82쪽

콜럼버스는 신세계로 가는 길을 개척하고자 했다. 네브리하는 스페인의 신민이 쓰는 언어를 표준화할 방안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길을 고안해냈다. _109쪽

‘자기’는 낱말과 기억, 생각과 역사, 거짓말과 서술 등과 마찬가지 수준으로 문자적 구성개념이다. 구술 시대에 구전 서사시와 그것을 노래하는 사람을 분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20세기의 서술과 자기는 서로 떼어놓기가 불가능하다. 작가는 이야기를 자기의 일부처럼 자아낸다. 20세기의 시민은 갖가지 과학의 눈을 통해 자기를 글월이 켜켜이 쌓인 케이크처럼 바라본다. 18세기 이후로 국가는 문자의 신문 대상이 된 자기들의 집합체가 되었다. _113쪽

침묵이 문자화되면서 ‘나’ 그리고 분석적인 우리의 새로운 고독이 생겨났다. 지금 우리는 소통에 의지하여 존재하게 된 글월 속의 한 줄이다. 낱말 앞에 오는 침묵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어떤 양식이 자리잡기 이전의 혼란한 잡음 속 메시지가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글월 이전 구술 시대의 우리, 양심 속에서 이어온 ‘민속적’ 우리는 현실로부터 사라졌다. 우리는 민속적 우리가 분석적 우리로 바뀌는 과정에 침묵의 역사가 개입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_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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