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서울과 교토의 1만년'은 교토를 중심으로,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일 관계사와 일본의 역사를 살핀다.
천 년 넘게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는 곳곳에 유적과 유물이 있는,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도시다. 선진 문물을 일본에 전파한 도래인(이주민)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조를 단행했던 곳이며, 윤동주와 정지용 등 우리 유학생들의 애환이 어린 곳이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노동자로 동원된 뒤 일본에 잔류한 재일동포 집단 거주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한일관계사의 권위자인 정재정 교수가 교토의 곳곳을 다니며 이러한 역사의 현장을 더듬은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본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고 그곳 학자들과 교류하며 한일 관계사를 연구한 저자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사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 준다.
이 책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두 나라가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어떻게 다른 문화를 형성하게 됐는지 그 배경과 흐름을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저자는 왜 교토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었을까?
교토는 백제, 신라, 가야, 고구려 등 아시아 대륙에서 건너간 이주민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으로, 그들이 일본 문명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무가와 천황 간 정권 교체의 중심에 있었기에 이 정권 교체가 일본과 이웃 나라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보여 준다. 또한 교토는 수도의 지위를 잃고도 거듭 변신을 꾀하며 발전해 왔는데, 이를 위한 교토시민의 다양한 노력을 볼 수 있다.
역사적인 사건이 많이 벌어졌던 곳이며, 세력가들이 자신의 권세를 자랑하고 싶을 때 이곳에 건축물을 지었기 때문에 역사의 흔적이 담긴 유적·유물이 많다. '교토에서는 발에 차이는 게 세계문화유산'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임진왜란의 시작점이기에 우리와는 악연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곳은 조선인의 귀와 코를 베어다 묻은 이총과 고종황제를 황제 자리에서 쫓아낸 장본인인 메이지 천황의 묘가 있는 곳으로, 순종황제는 그 묘를 참배하는 능욕까지 겪었다. 우리 역사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윤동주, 송몽규, 정지용 등이 유학했고, 많은 한국인 노동자가 일했던 곳이라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살았던 한국인들의 활동과 행적을 읽을 수 있다.
지금도 시내에 1,600여 개의 사원과 400여 개의 신사가 성업하고 있는 곳으로, 일본의 독특한 종교 문화를 느낄 수 있다.
책 속으로그런데 한국과 일본의 문화 교류를 이야기할 때 조심할 사항이 하나 있다. 흔히 아시아 대륙과 일본열도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한반도 일대가 문화 교류에서 교량의 역할을 해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교량은 인간이 건너다니는 연결고리일 뿐,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다. 한반도 일대는 옛날부터 한국인이 살아왔고, 독특한 문명을 발전시켜 온 역사 전개의 무대이다. 따라서 한반도 일대가 아시아 대륙 문명을 일본열도에 전달하는 교량의 구실을 해 왔다는 표현은 자칫하면 한반도 일대에 살아온 한국인의 존재와 그 역할을 무시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역사 인식의 왜곡을 키울 수 있는 것이다.
아시아 대륙 문명이 한반도 일대에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일본열도에 전달된 것은 아니다. 아시아 대륙 문명은 한반도 일대에 수용된 후, 이곳의 주인공인 한국인에 의해 한국식으로 소화되고 변형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아시아 대륙의 문명만이 아니라, 한반도 일대에 산 한국인의 창조적 활동에 의해 형성된 개성적인 한국 문명이 일본에 전해진 것이다. -P59
일본에는 800만 이상의 신이 있다고 한다. 일본에 이렇게 신이 많은 것은 일본의 문화 풍토와 신앙 세계가 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애니미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평생 한 구멍만 파고드는 일본인들의 전공 집착 의식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들은 신에게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공부, 싸움, 양조, 직조, 연애 등 영역에 따라 효험을 베풀 수 있는 전공이 따로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분야나 영역을 나누어 주관하는 신이 따로 존재하게 된다.
일본인들은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유일신을 믿으려 하지 않고, 자기가 필요할 때마다 전공에 맞는 신사를 찾아가 빌어야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본에는 돈벌이를 잘하게 해 주거나 교통안전을 지켜 주는 신 등을 찾아 여기저기 몰려다니는 참배객 무리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어쩌면 자기의 전공에 부합하는 소원만 들어 주는 일본의 신은 모든 소원을 다 들어 주어야 하는 한국의 신보다 훨씬 덜 바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일본 신들의 원조를 따져 올라가면 대개 도래인에게 귀착하니, 정말 야릇하고 미묘하다. 유교화 또는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가 버린 것들이 일본에 침전되어 새끼를 치고 번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이가 한국과 일본의 문화 의식과 소비 양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받아들인 것을 한 번 쓰고 내버리는 '설사 문화'고, 일본은 받아들인 것을 꼭꼭 쌓아 두고 우려먹는 '변비 문화'라고. 비유가 좀 지저분하기는 하지만, 정곡을 찌른 한일 비교 문화론이라고 생각한다. - P103
메이지 유신은 한국인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이를 통해 일본은 근대화의 길로 나아간 반면, 조선은 그런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국을 넣으면 메이지 유신의 무게는 더욱 묵직해진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철저하게 단행하여 근대국가로 탈바꿈했다. 반면에 중국은 근대화 운동인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뜨뜻미지근하게 전개하여 근대국가로 변신하는 데 실패했다. 청일전쟁(1894~1895년)은 30여 년 동안 두 나라가 추진해 온 근대화 운동의 성과를 겨루는 결전장이었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함으로써 동아시아의 패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반면에 중국은 이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열강에게 갉아 먹히는 반(半)식민지로 전락했다. 이런 점을 주목하면 메이지 유신은 한국·중국·일본이 각각 처지가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삼극분해(三極分解)의 기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234
메이지 천황은 일본이 보잘 것 없는 동양의 한 군주국에서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근대 제국으로 발돋움할 때 그 원동력이 된 존재였다. 따라서 ‘'메이지'는 단순한 연호가 아니라 일본의 잠재된 에너지가 한꺼번에 폭발하여 세계로 뻗어나간 유신 시대를 상징하는 역사 용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상징인 메이지 천황의 무덤이 교토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도 도쿄에 유학했을 때 하라주쿠 역[原宿驛] 근처에 있는 메이지신궁[明治神宮]이 그의 무덤인 줄 알고 뙤약볕에 땀을 뻘뻘 흘리며 멀고 먼 자갈길을 걸어서 찾아갔던 적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메이지 천황의 무덤은 교토의 동남쪽 후시미에 있다. 메이지의 모모야마 어릉[桃山御陵] 묘역은 그 자체가 큰 산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쌓은 후시미 성이 그 근처에 복원되어 있고, 교토에 처음으로 수도를 정했던 간무 천황의 무덤도 그 옆에 있다. 일본 문화사의 시대구분에서 도요토미 시기를 모모야마 시기로 부르는 경우도 있는 것을 보면, 이곳은 일찍부터 일본의 역사를 대표할 만한 명당이었던 것 같다. -p354
정재정 지음 | 을유문화사 |504쪽 |1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