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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본 백범일지', 그의 숨결까지 구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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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본 백범일지'의 탈초·교감자인 도진순 교수는 1994년에 백범 선생의 아들 고 김신 장군으로부터 '백범일지'의 원본 사본을 기증받았고, 당시 한 차례 탈초한 바 있다. 하지만 연구가 미진하다고 판단해 우선 주해본을 1997년에 출간하고, 이후 20년 가까이 '백범일지' 연구에 매진했으며, 이제 결정판이라 부를 만한 '정본 백범일지'를 세상에 내놓는다.

수고(手槁)로 이루어진 '백범일지'는 숙독하지 않으면 맥락을 종잡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문장의 전후 비교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그것을 백범의 심중(心中)과 연결해 보아야 비로소 글이 온전한 생명력을 얻게 된다. '정본 백범일지'는 탈초 과정에서 빠트린 부분을 제자리에 집어넣고, 번역의 오류를 문맥에 맞게 바로잡았으며, 백범의 집필 당시 오류 또한 주석을 통해 바로잡았다. 도진순 교수는 이미 주해본 '백범일지'(1997, 돌베개)에서 상당 부분의 오역과 오독을 지적하고 주석으로 설명했지만, 이 책을 통해 주해본 출간 이후의 연구 성과까지 모두 반영하였다.

'백범일지' 상권은 대부분 녹색선 450자(30×15) 원고지에 펜으로 쓰고 펜 혹은 붓으로 수정·보완했다. 상권 마지막 줄에는 1년 2개월 걸려 1929년 5월 3일에 상권 글쓰기를 마쳤다는 기록이 있다. 1929년은 54세의 백범이 한창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엄혹한 시절이었다. 그러니 1년 남짓 걸려 출생부터 당시까지의 경력을 급하게 써내려간 글들에는 어그러진 문맥과 사실 기록의 오류가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탈고 이후에도 백범은 수시로 글을 수정하고 보완하고 삭제했다.

― 백범은 유독 어머님에 대해서 각별하게 내용을 보완했는데, 해방 이후 수정한 상권에서는 어머님과 관련하여 1차 원본에서 오히려 삭제한 부분이 있다.

“母親 年歲가 겨우 十七이라, 恒常 내가 죽어시면 조켓다는 苦歎을 하섯다 한다.”
여기서 ‘연세(年歲)가 겨우 십칠(十七)’과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고탄(苦歎)’ 사이에 인과관계가 잘 연결되지 않는다. 또한 여기서 ‘내가’가 아들인 백범을 가리키는지 어머님 자신인지도 분명치 않다. 그런데 등사본을 살펴보면 이 사이에 “子女 養育에 職責感이 不足하야”가 들어 있다. 그리하여 전문을 현대어로 풀면 ‘어머님의 나이 17세 때라, 자녀 양육에 직책감이 부족하여, 항상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고탄(苦歎)을 하였다고 한다’로 전체의 문맥과 인과관계가 부드럽게 이어진다. 이것이 1차 집필 당시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이 어머님에 대한 불효라고 생각하셨는지 해방 이후 원본에서는 이 부분을 삭제하였다.

'정본 백범일지'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탈초과 교감이 정밀하게 이루어진 원본의 탈초본이 있어야, 연구자들이 이 책을 저본으로 하여 연구·번역을 하고, 이를 통해 오역(誤譯)과 오독(誤讀) 없는 책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원본이 알아보기 힘든 수고로 쓰인데다가, 탈초 과정에서 잘못된 부분까지 여태껏 바로잡히지 않고 그대로 이어져 온 것들이 너무나 많다.

― 1894년 말 백범은 황해도 동학군의 ‘팔봉 접주’로 해주성 공격에 선봉으로 나서지만 실패하고, 해주 서쪽 80리 후방인 회학동으로 후퇴했다. 이때 정덕현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백범에게 동학군의 5개 방책을 제시하는데, 제1조가 군기에 관한 것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軍紀正肅(兵卒를 對하여도 互相拜 互相敬語 等을 廢止할 일)”
이 구절은 동학군이 ‘평등주의’ 때문에 군기가 문란해진 것을 보고, 정덕현이 상하의 엄격한 군기와 질서를 세울 것을 강조한 것으로, 당시 동학 농민부대의 군율과 기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국사원본에서는 이 부분을 “1. 군기를 정숙히 하되 비록 병졸에 대하더라도 하대하지 아니하고 경어를 쓸 것”으로 독해하고, 이후 거의 모든 책들이 이것을 따랐다. 이것은 병졸에게도 경어를 쓰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서 비롯되기도 했겠지만, 어쩌면 ‘廢’(폐)자가 초서로 적혀 있어 잘못 읽은 탓도 있을 듯하다.

― 하권에서는 중국 동북 삼성의 정세를 소개하면서, “우리 獨立軍이 벌서 影絶되엿을 터이나” “今日까지, 오히려 金一聲 等 武裝部隊가 依然히 山岳地帶를 依據하고 鴨綠 豆滿을 越하여 倭兵과 戰爭되는 데는”이라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인명 ‘김일’(金一) 다음의 한 글자를 필사본은 ‘정’(靜)으로, 직해본은 ‘택’(擇)으로 해독했다. 하지만 이 글씨를 확대해 보면 성(聲)으로 읽는 것이 맞다. 김일성(金一聲), 바로 북한의 김일성(金日成)과 동일 인물이다. 백범은 해방 이후 1948년 남북연석회의를 통해 북의 김일성과 만나 회담했는데, 일제 강점기에도 만주 지역의 김일성을 주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40년대 김구는 임시정부의 주석으로서 항일독립운동의 확대와 연대를 위해 동북 지방의 김일성 빨치산 부대와 합작을 시도했다. 백범의 측근 안우생의 회고에 따르면, 이충모가 백범의 신임장을 휴대하고 김일성을 찾아 중경을 출발하여 산서성 태원까지 이르렀으나 중도에서 8·15광복을 맞이하게 되어 성사되진 못했다고 한다. 일제 말기 김일성과의 합작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이러한 경험이 1948년 백범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서신을 보내 남북합작을 추진하는 배경이 되었다. 그 단서가 되는 인명이 『백범일지』에 ‘김일성’(金一聲)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필사본과 직해본의 오류 이후 거의 대부분의 책들이 이 번역을 따랐고, 도진순 교수의 주해본 '백범일지'가 나옴으로써 비로소 김일성임이 밝혀졌다.

― 백범은 치하포 사건으로 1896년 7월에 인천감리서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898년 3월에 탈옥한다. 당시 삼남 지방으로 피신하며 강경포의 공종렬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의 기록에서 오역들이 발견된다. 본문은 다음과 같다.
“‘간새벽에 갯가에 얼인 아희 우는 소리가 들니드니, 소리가 끊어진지 오랫으니, 그 아희는 죽은 거시라’고 야단 일다. 나는 이 말을 들으매 天地가 아득하다. 오늘날殺人을 하고 가는 길이로구나.”

사연은, 공종렬의 누님과 그 집의 하인이 관계를 맺었고, 누님은 아이를 출산하다 그만 죽고 말았다. 공종렬이 그 하인과 갓난아이를 집에서 쫓아내려 하지만 하인이 말을 듣지 않았고, 이에 백범에게 사정을 말하여 백범이 대신 하인을 꾸짖고 협박해 그 하인이 새벽에 집을 떠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하인은 떠나면서 갓난아이를 강변에 버리고 감으로써 결국 아이가 죽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서 위 원문의 밑줄 친 부분을 거의 모든 '백범일지'에서 ‘오늘날∨살인’으로 띄어쓰기하여 ‘오늘날 살인을 했다’ 또는 ‘오늘 살인을 했다’라고 독해한다. 하지만, 시대를 지칭하는 ‘오늘날’은 갓난아이가 죽은 ‘간새벽’이란 구체적인 시점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 대목은 ‘날살인’으로 읽어야 의미가 온전하다. 즉 ‘오늘∨날살인’으로 띄어쓰기해야 한다. 여기서 ‘날-’은 ‘날강도’ ‘날건달’ 등의 접두사 ‘날’과 같은 의미로, ‘날살인’은 일반 살인보다 더 질이 나쁜 살인으로, 무고한 어린아이를 죽게 만든 회한이 반영된 단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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