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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어떻게 여기까지 왔고,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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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왜 대학에 가는가', 30여 년 경력의 미국 대학교수 지음

 

국가는 취업난을 타개하고자 잇따라 대학 구조조정 대책을 내놓고 대학은 앞장서서 이 대책을 실행하려 하지만, 취업 중심의 대학 구조조정안을 반대하는 건 역설적으로 대학생들이다(최근의 평생교육단과대학 사업, 프라임 사업, 코어 사업 등을 둘러싼 학교-학생 간 갈등이 그 단적인 예이다). 그러한 구조조정안으로 지금의 취업난이 해소될 수 없다는 판단도 있겠지만, 학생들은 무엇보다 대학은 취업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기관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참된 대학은 한 가지 목표만을 추구한다. 그것은 고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기가 살찌우는 인생의 목적과 이치를 아는 것이다." _W. E. B. 듀보이스

대학을 둘러싼 이 역설을 이해하고 해소하자면 우리는 '대학'에 대해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대학은 왜 존재하는가, 우리는 왜 대학에 가는가, 지금 대학이 당면한 문제는 무엇이고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컬럼비아대 영문과 교수 앤드루 델반코의 '왜 대학에 가는가'는 이 근원적 질문들을 던지고 답할 목적으로 쓰여졌다. 델반코 교수가 염두에 둔 현실은 미국의 대학과 대학교육에 관한 것이지만, 한국의 문제이자 전 세계 공통의 문제이기도 하다,

30여 년간 대학에 몸담아온 저자는 미국에서 대학이 언제 처음으로, 무슨 목적으로 생겨났는지, 그렇게 생겨난 대학이 400여 년 가까이 어떤 궤적을 밟아왔는지, 그리고 그간 저질러온 실책들은 무엇이었는지를 먼저 다룬다.

1장 「대학의 목적」, 2장 「대학의 기원」, 3장 「칼리지에서 대학으로」는 주로 미국 고등교육의 역사를 개괄하며, 흥미로운 역사적 근거들을 풍성하게 제시한다. 4장 「낮춰도 낮춰도 높아지는 문턱」과 5장 「멋진 신세계」는 미국 고등교육의 현주소를 가감 없이 드러내 보인다. '사회 이동'의 엔진이기보다는 외려 불평등 구조를 공고히 하는 대학, 대학 진학을 위한 맹목적 경쟁, 천문학적인 사교육비, 취업 유예기간을 얻고자 대학원에 진학하는 학생들, 인문학 같은 '쓸모없는' 과목을 외면하고 '시장성 있는' 과목으로 우르르 몰려간 학생들, 학점 인플레이션 등, 델반코가 폭로한 미국 대학의 현주소는 우리네 대학 풍경으로 읽어도 전혀 이질감이 없다.

6장 「무엇을 할 것인가」는 각 대학 현장에서 이 위기들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그리고 위기 돌파 해법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대학'의 희망적인 지점들을 살펴본다. '대학은 우리에게 무엇이었고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가What It Was, Is, and Should Be'라는 부제처럼 저자는 대학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 책 한 권에 담아냈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탄 영국 청교도들은 영국국교회에 저항해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이주했다. 신대륙에 일종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싶었던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교육, 그중에서도 신학 교육이었는데, 신대륙 이주 16년 만에 이들은 영국의 대학을 모델 삼아 뉴잉글랜드의 뉴타운에 대학을 세우게 된다. 청교도 상인인 존 하버드는 이 뜻에 동참하고자 자신의 재산 절반과 장서 모두를 이 대학에 기증한다. 이후 윌리엄 앤드 메리 칼리지(1693년 설립), 예일대(1701년), 프린스턴대(1746년), 컬럼비아대(1754년) 등이 차례로 설립된다. 저자가 미국 대학의 기원을 먼저 살피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종교적 열정이 미국 특유의 대학을 만들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대학은 종교 너머의 폭넓은 영역까지 아우르는 교육기관이었다는 것이다.

대학교수를 뜻하는 프로페서(professor)가 원래 "청교도 교회에서 일종의 공식적인 교회 입문의 뜻으로 신도들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을 가리킨 것처럼 델반코는 미국 대학의 기원에 종교가 자리잡고 있다는 증거들을 들추어내 그 기원의 명과 암을 재평가한다. 그리고 지성과 인성을 아우르는 전인교육을 시행했던 초기 미국의 칼리지가 남북전쟁 이후 대학으로 변모하면서 어떻게 전문화를 지향해왔는지, 그 과정에서 잃은 것은 무엇인지를 저자는 짚어 보인다.

사실 미국에서는 대학을 가리킬 때 칼리지college와 대학university이라는 용어를 특별히 구별하지 않고 혼용한다 대학과 칼리지가 같은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둘은 같지 않다. 물론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칼리지가 대학 내의 학부나 단과대학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칼리지와 대학은 설립 목적이 다르며, 또 마땅히 달라야만 한다. 칼리지의 설립 목적은 학부 학생들에게 과거의 지식을 전수해 이를 미래에 살아 있는 지식으로 활용하게 하는 데 있다. 반면 교수와 대학원생이 이끄는 다양한 연구 활동의 주무대가 되는 대학은 시대에 뒤처진 과거 지식을 대체하기 위해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데 목표를 둔다. (16~17쪽)

흙수저, 금수저는 오늘날 한국의 불평등한 현실을 빗대어 표현하는 신조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히려 이 현실을 체념하고 심지어 긍정하기도 한다는 연구결과가 최근 발표됐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이 공평하게 작동하지 않는 사회에서, 청소년들이 오히려 능력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십대는 사회경제적 약자에 대한 배려보다는 개인의 능력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자신의 환경적 요인이 불리한 학생들과 유리한 학생들은 능력을 중시하는 정도에 있어서 거의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오늘날 저명한 전문가들은 성공이 그들 자신의 능력, 노력, 그리고 뚜렷이 보여준 성과에 대한 보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중요성에 몹시 심취한 나머지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타인들에 대한 연민을 망각한다." (197~198쪽)

앤드루 델반코는 이 책의 5장 「멋진 신세계」에서 현대사회의 능력주의(meritocracy)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1958년 발표된 마이클 영의 소설 '능력주의 사회의 등장'은 2033년 시점의 미래사회를 "지능+노력=능력의 공식에 근거한 섬뜩할 정도로 경쟁적인 사회"로 그려낸다. 1900년 무렵만 해도 능력이 "사교적인 사람의 활력과 성실함"을 의미했다면, 20세기 들어 그 의미가 지나치게 세속적으로 쪼그라든 것이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물론 대학이 있었다. 역사학자 제롬 카라벨은 "능력의 의미를 놓고 되풀이된 고투의 역사"가 곧 명문대 입시의 역사라고 요약하기도 했다(186쪽).

능력과 경쟁의 가치가 득세하는 동안 대학은 지원자의 경제력을 따지지 않고(학자금 신청 여부와 관계없이) 학업능력만으로 입학을 결정하는 니드-블라인드 입학정책과, 가족의 경제력을 고려해 장학금을 차등 책정하는 니드-베이스드 재정 지원정책을 마련했다. 부모의 소득수준에 따른 불평등/불이익에 맞서 대학 나름의 사회 안전망을 제도적으로 마련해온 것이다. 그럼에도 대학은, 특히 명문대는 능력주의라는 현대사회의 엔진을 계속해서 강화해왔다. 해마다 발표되는 대학 순위에 전 세계가 집중하고, 교수와 대학 총장이 기업들로부터 천문학적인 보수를 받는 데 사회는 무관심하며(혹은 당연하게 여기며), 졸업 후 미래가 두려운 학생들은 실용적인 교육과 취업 이슈에 더욱 집중하고, 그 요구에 부응하려는 대학은 점차 직업교육기관으로 스스로의 위상을 축소시키고 있다.

불행히도 많은 대학들은 좋은 운을 타고난 사람이 덜 가진 사람에게 베풀며 살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학생들에게 심어주지 못함으로써, 불안에 나포된 학생들에게 거의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실은 공동체 자체의 이념이기도 할) 대학 이념의 핵심에 자리한 통찰 중 하나는 남을 돕는 일은 곧 나 자신을 돕는 길이라는 것이다. 남을 돕는 일은 삶에 목적의식을 부여해주어 나이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겪게 마련인 외로움과 막막함을 극복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 “교수들은 오늘날 학부생들을 민주 시민으로 성장시키는 데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한때 교양교육의 기본 목표라 일컬어지던 과제였으며 지금 이 순간 미국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과제인데도 말이다.” (214~215쪽)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20년간 하버드대 총장으로 재직한 데릭 복의 지적처럼 대학은 학생들을 민주 시민으로 성장시키는 교육기관이고, 그 성장 커리큘럼의 핵심은 교양교육이다. 학부 4년 동안 고전 100권을 공부하는 교양교육 프로그램으로만 운영되는 세인트존스 칼리지는 매우 특별한 사례다. 컬럼비아대는 학부 2년 동안 중핵 교육과정이라는 교양교육을 제공하는 대안을 만들었고, 하버드대는 학부생 800여 명을 상대로 한 마이클 샌델 교수의 대형 강의 같은 모델을 통해 과학, 인문학, 사회과학의 기초 지식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교양교육 프로그램은 "진리, 책임, 정의, 아름다움"(246쪽) 등의 주제를 다루고,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주는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우주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127쪽) 같은 질문을 곰곰이 생각하도록 이끈다.

그러나 위의 예외적인 모델들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대학에서 교양교육의 비중과 가치가 줄어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중간지대"를 건너가는 위태로운 젊은이들에게 대학이 사색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줄 수 없다면, 대학이 현실세계의 경쟁 원리에 지배되어 오로지 취업 문제에 집중하는 기관이라면, 우리는 무슨 근거로 그곳을 계속해서 '대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대학이 나빠지고만 있다는 비관론은 물론, 디지털 혁명이 대학교육에도 발전을 가져올 거라는 식의 천진한 낙관론도 우리 모두는 경계해야 한다. 델반코의 안내를 따라 살펴보았듯이 대학은 지금까지 쉼 없이 부침을 거듭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인식하고 미래를 전망한 후, 지금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것이다.

'왜 대학에 가는가'는 현재 미국의 대학 곳곳에서 실험중인 혁신적인 프로그램들을 소개하면서 마무리된다. 스탠퍼드대는 '희망의 집' 프로그램을 통해 치료감호소의 약물중독자와 전과자들에게 고전을 가르치고, 바드 칼리지는 뉴욕 동부 교도소의 재소자들에게 문학, 수학, 역사, 철학 수업을 제공한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수강생들에게 "정신의 자유와 기쁨"과 "자신감"을 느끼게 하며 소기의 목적 이상을 달성하고 있다. 게다가 이는 각 대학 재학생들이 그간 당연시해온 대학 진학과 배움의 문제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이끈다는 점에서 부수적인 성과도 거두었다. 대학이 시민사회단체와 협력해 수업과 봉사 활동을 명시적으로 연계한 실험 또한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학생들이 대학 수업을 통해 이민자 가정이나 노인 등 사회 약자를 돕고, 환경단체의 리서치를 거드는 등의 활동은 비교적 최근에 시작된 일이다. 동성 결혼, 총기 규제 같은 사회적 논쟁에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교육도 점차 강화되는 추세이다. 대학이 지금보다 더욱 의미 있는 공간되는 건 이 같은 실험들에, 결국은 ‘학생 중심의 교육’에 달려 있을 것이다. 델반코는 이 책을 이렇게 마무리 짓는다.

대학은 세상의 갑론을박으로부터 도피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학은 젊은이들이 의미 있는 삶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동료들과 또 자기 자신과 끝까지 싸우는 곳이어야 하고, 자신의 이익이 타인에 대한 배려와 꼭 상충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곳이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대학을 잘 보존하고 지켜내 후대에 물려줄 책임이 있다. 민주주의는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 (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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