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형규 목사는 민주화의 상징이었다.
[앵커]
故 박형규 목사는 민주화의 상징이었습니다.
평범한 목사였던 박형규 목사가 민주화 운동에 나선것은 4.19때 청와대 앞에서 총에 맞아 쓰러진 학생들을 목격하고부터 였습니다.
박 목사는 학생들과 함께 한 민주화운동이 자신의 목회 활동의 일부였다고 생전에 이뤄졌던 CBS와의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유영혁 기잡니다.
[기자]
故 박형규 목사가 처음으로 교도소에 간 것은 박정희 독재정권이 10월 유신을 선포한지 6개월 뒤였습니다.
박 목사는 1973년 4월 22일 남산야외음악당에서 열렸던 부활절 예배에서 민주주의 부활과 독재 정권에 대한 투쟁을 선언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故 박형규 목사는 이사건으로 처음 옥고를 치렀습니다.
[인터뷰] 故 박형규 목사 / CBS대담 '나의 믿음은 길위에 있다' 중, 2012년 10월 7일
"처음 갔을때는 나도 사람이라 울었어요. 나중에 여러번 감옥에 가니까 교도관들하고 친해졌어요. 서대문 가니까 또 들어왔어요"
박 목사가 조사받은 곳은 경찰서가 아니라 서빙고에 있는 보안대였습니다.
[인터뷰] 故 박형규 목사 / CBS대담 '나의 믿음은 길위에 있다' 중, 2012년 10월 7일
"잡혀간 곳이 경찰서가 아니고 서빙고 보안대 갔는데, 조사받으면서 고문을 많이 당했어요. 유신체제에 대한 시발점이 됐어요."
故 박형규 목사는 이듬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민청학련사건)'에 연루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복역 10개월만에 석방되기는 했지만 이후에도 고 박형규 목사의 독재 정권 시절 목회활동은 교회 뿐만아니라 거리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인터뷰] 故 박형규 목사/ CBS대담 '나의 믿음은 길위에 있다' 중, 2012년 10월 7일
"나는 도둑질해서 들어간 것 아니고 민주화운동을 위해 학생들과 함께 활동하다가 감옥에 가니까 다 동지들이죠."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교인들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진행된 국가보안사령부의 방해로 6년동안 길거리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민주화운동으로 6차례나 투옥됐던 박형규 목사의 삶과 신앙은 '행동하는 신학, 실천하는 신앙'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싱크] 김영주 목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목사가 시대의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은 고난과 고통을 짊어지는 건데 목사님이 그 짐을 기꺼이 짊어진데 대해 아 목사의 삶이 이런 거구나… "
박형규 목사는 총에 맞아 죽어가는 학생들을 목격하고 자신의 목회 방향을 바꿨다고 말했습니다.
[인터뷰] 故 박형규 목사 / CBS대담 '나의 믿음은 길위에 있다' 중, 2012년 10월 7일
"4.19때 청와대 앞에서 학생들이 총맞아 죽는 현실을 보고 이게 아니구나 나도 좀더 적극적인 정치적인 사회적인 현실에 대응하는 목회를 해야 겠구나"
서울 작은 교회의 평범한 목회자였던 故 박형규 목사.
독재라는 정치 환경에서 학생들과 함께 독재에 저항한 것은 목회였고 신앙을 실천하는 삶이었습니다.
CBS 뉴스 유영혁 입니다.
[영상취재 이정우 채성수 영상편집 서원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