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식시장의 전설로 불리는 사장님들이 들려주는 '장사의 철학', 그들의 이야기가 "장사나 해 볼까?" 생각하는 창업 꿈나무들과 장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700만 자영업자들에게 장사의 대한 마음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칼럼을 시작한다. [편집자 주]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옛 어른들은 국수란 음식을 홀대했던 거 같다. 끼니로 때우기엔 부족하고, 별식이라고 하기엔 허술했기 때문일 것이다.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 먹을 게 귀하던 시절, 먹고 기침만 해도 소화가 되는 음식이 대접받기는 어려웠을 터. 생각해보면 농사꾼이었던 우리 할머니도 우리가 먹고 뛰어노는 걸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셨다. 배 꺼진다고.
국수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음식이 막국수다. 이 음식을 얼마나 '막' 대했으면 이름마저 '막'국수란 말인가. 예전에는 맷돌에 메밀을 껍질째 갈아서 국수를 만들었기 때문에 먹고 나면 치아에 메밀껍질이 까맣게 꼈다고 한다. 지금이야 도정기술이 워낙 발달해 껍질의 흔적이라고 해봐야 면에 거뭇거뭇한 점들이 전부지만.
밀가루가 흔치 않던 시절에는 다들 메밀로 국수를 해 먹었다. 겨울에는 동치미에 국수를 말아서 운이 좋아 꿩이라도 잡는 날엔 고명으로 꿩고기를 올렸다. 여름에는 새콤달콤한 양념장을 만들어 비벼 먹었다. 그런 메밀국수를 '막국수'란 이름으로 간판을 처음 단 이가 바로 고 임금례 할머니(김종녀 사장의 시어머니)다. 그렇게 막국수는 1962년 춘천의 작은 실비집에서 출발했다.
◇ 내가 꼭 가게를 지켜야 한다
김종녀 사장이 스물한 살에 시집을 와 보니 춘천시 중앙로 2가, 현재 중앙시장 맞은 편에서 시부모님이 식당을 하고 있었다. 당시 막국수 단품이었는데도 장사가 꽤 잘 됐고 맏며느리로 시집 간 김종녀 사장은 장사가 싫고 자시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식당 일에 뛰어들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여겼고 힘든 줄도 몰랐다. 그에게 가장 힘든 건 호랑이 시어머니였다.
"너무 무서웠어요. 늘 야단치고 성질부리고 그러다 메밀반죽을 던지기도 하셨죠."그래서 많이 울었다고 한다. 보수도 제대로 못 받고 밤낮없이 일했지만 돌아오는 건 늘 핀잔뿐이었으니, 더 서러웠을 것이다.
8년을 시부모님 밑에서 눈물 쏙 빠지게 고생하면서 일을 배운 김종녀 사장은 1972년, 드디어 분가를 하게 됐는데 그게 서울 다동이었다. 당시 막국수를 먹으러 춘천 가게를 일부러 찾아오는 서울 손님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 서울로 상경해서도 막국수 장사는 꽤 잘 됐다. 당시 막국수는 생소한 음식이었지만, 서울 깍쟁이들 입맛에도 제법 잘 맞았던 모양이다. 1970~80년대 장사가 잘 되던 시절에는 돈 받을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 카운터에 구멍을 뚫어놓고 손님에게 셀프계산을 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만큼 바빴던 것.
서울로 분가한 '산골면옥'이 이렇게 승승장구하는 사이, 작은 아들이 물려받은 춘천의 할머니 가게는 문을 닫게 됐다. 명성만 믿고 주인이 가게를 지키지도 않았다니 그 끝은 불을 보듯 뻔하다. 대를 잇는다고 해서 장사가 거저 되는 건 아니다.
대를 이은 사람은 이전의 명성을 지키면서도 시대변화에 대처할 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하루아침에 손님들이 몰려와 줄을 설 수 있는 것도 식당이지만 반면에 아무리 오랜 명성을 쌓은 식당이라 해도 하루아침에 문을 닫을 수 있는 것이다.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 직접 장을 보는 꼼꼼함3대를 이을 아들에게 부족한 게 뭔지 묻자 김종녀 사장은 딱 한 가지를 지적한다.
"손님을 대할 때 공손하고 친절해야 되는데, 그렇지가 않네요."그 부분에 있어서 아들도 할 말이 많다.
"저희 가게는 어르신들이 많이 오시는데, 특별대우 받기를 원하는 분들이 종종 계세요. 그 분들이 원하는 특별서비스가 힘든 게 아니라… 그게 다른 손님들한테는 불편 할 수 있어요. 그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원래 진상손님은 단골진상이 갑이다. 아들의 반박에 김종녀 사장이 되받아친다.
"그런 걸 다 받아줘야 하죠. 우리 집 찾아오는 손님인데…."모자 간에 가장 합의점이 보이지 않는 지점이다. 모자가 또 하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게 있다. 가장 좋은 식자재를 쓰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간혹 상추나 양파가 천정부지로 올라 구하기도 쉽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일수록 김종녀 사장은 더 많이 사서 쟁여 놓는다.
"없어서 못 쓰면 어떡해요. 뭐든 많이 사서 쌓아 놔야 안심이 돼요. 가을에도 쌀을 수십 가마니 들여놓고, 소금이든 양파든 많이 사요."농산물 가격이 오르면 정부가 움직인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다시 안정화시킨다. 그걸 아는 아들은 이렇게 말한다.
"조금만 기다리면 다시 가격이 떨어질 텐데 비쌀 때 많이 사서 쌓아 두니 결국 가장 비쌀 때 사서 쓰는 격이죠."게다가 장소도 협소한데 쌀이든, 소금이든, 고추든 몇십 가마니씩 사서 쌓아 두니 아들은 그게 답답한 것이다. 김종녀 사장은 답답해 하는 아들의 하소연에 그저 웃기만 한다.
'우리 아들 많이 컸네. 그래도 장사는 그런 게 아냐….' 하는 눈빛이다.
김종녀 사장 미소 뒤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을까. 나는 가늠도 하지 못하겠다. 분명한 건 3대를 걸쳐 춘천 막국수를 이끌어온 그가 그저 답답한 노인네는 아니라는 것이다.
늘 장사는 잘 됐고 앞으로도 잘 되겠지만, 김종녀 사장은 아들이 장사하는 걸 원치 않았다.
"저는 평생을 휴일도 없이, 휴가도 없이 밤이고 낮이고 일만 했어요. 아들이 그렇게 사는 걸 원치 않았어요. 그래서 좀 편한 다른 일을 했으면 했어요."그런 어머니를 보고 자란 아들이 식당 일이 얼마나 힘든지 모를 리 없다. 늦은 밤 혼자서 울고 계신 어머니를 종종 봤다고 한다. 왜 우셨을까? 진상손님의 억지 때문일 수도 있고, 자존심을 짓밟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수도 있고, 뼛골이 아픈 통증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저는 어린 마음에도, 저렇게 힘드신데… 이걸 안 하고 살 수는 없나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생계이고, 자식들과 유일하게 먹고 사는 일인데 어떻게 안 할 수 있었을까. 아들 말에 김종녀 사장은 말없이 웃는다.
아들은 좀 더 편한 일, 멋진 일을 했으면 바랬던 어머니 소망처럼 서민식씨도 예전에는 다른 일을 했다. 출판사도 했고, 건설업에도 손을 댔다.
"잘 됐으면 아마 막국수 집은 안 했을지도 모르지요(웃음)."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서민식씨는 사업을 하면서 사기도 당하고 부도도 맞았다. 그럴 때마다 구멍을 메워준 이는 어머니였다. 세상 풍파에 생채기가 나고 지친 아들은 결국 가게로 돌아왔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줄곧 막국수를 먹고 자란 그가 있을 곳은 바로 이곳이었던 것이다.
김종녀 사장은 지금도 직접 장을 본다. 가장 좋은 재료, 가장 신선한 재료여야 하기 때문이다.
"저희 가게는 특별한 노하우라는 게 없습니다. 메밀부터 음식에 쓰이는 모든 식자재가 신선하다는 게 노하우라면 노하우죠." (서민식씨) 어머니와 아들이 식당을 운영하면서 이견이 없는 게 이 부분이다. 가장 좋은 재료, 가장 신선한 재료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
◇ 직원은 가족이다
산골면옥의 면장은 할머니 때부터 일하던 직원이다. 근무 연수 20년이 넘은 직원도 여럿이다. 직원들이 수십 년씩 나가지 않고 일하는 데는 특별한 비결이 있을 것이다. 그 비법에 대해서 묻자. 김종녀 사장은 딱 한 마디 한다.
"우리는 그냥 가족처럼 대해요."집안 살림 어렵다고 해서 가족을 굶기고 내보낼 수는 없는 법. 가족이라고 생각한다면 밥 더 준다고 다른 집으로 가지는 않는다. 산골면옥 직원들은 이미 가족이었다.
이곳의 음식은 젊은 사람들 입맛에도 잘 맞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에겐 문턱이 높다. 위치가 그렇고, 인테리어가 그렇다. 오래도록 이 집을 지켜준 건 분명 충성도 깊은 단골이겠지만,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막국수 맛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막국수는 평양냉면보다 저렴하지만 젊은 사람들 입맛에 더 잘 맞을 것이다. 젊은 사람들에게도 만능 양념범벅, 치즈범벅이 된 음식이 아니라 이런 맛깔스러운 음식을 먹을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