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후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겪은 조선은 붕당 정치의 대립, 농업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사회 분업의 진전, 지방 장시의 증가로 인한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등 여러 면에서 민중의 생활 조건이 바뀔 만한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신분보다 경제적 관계가 주요 문제로 부각되면서 부를 축적한 양인이나 노비가 등장하는 한편, 신분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하는 노비도 증가했다. 양반 가운데 일부는 토지를 잃고 몰락해 전호가 되거나 임노동자로 전락하기도 했다. 급격한 사회 변화와 그에 따른 불안감은 민중이 지배체제에 다양한 형태로 저항하게끔 유도했다.
'조선 민중 역모 사건'의 저자는 조선 민중의 저항과 반란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과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재판 기록에 주목했다. 민중이 국가를 반하는 역적·흉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당대의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확인하고 이러한 반역자들이 벌인 사건들을 조선왕조는 어떤 방식으로 처리해나가는지를 사건 발생의 원인, 내용, 사건의 전개, 참여자들의 참여 동기, 의식 등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모반대역’은 국가를 위태롭게 하거나 왕권을 상징하는 종묘와 궁궐 등을 파괴하려고 모의한 범죄를 지칭한다. 몰락한 양인 길운절과 소덕유는 제주목사가 민심을 잃은 틈을 타 토호 세력과 결탁해 역모를 꾸몄으며, 거사패였던 유태수 등은 요역을 피해 함경도에서 만 명의 사람을 모아 역모를 시도하려 했다. 또한 노비 박업귀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양반들을 미혹해 병권을 모아 서울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이름난 도적인 이충경은 유민을 모아 '개국대전(改國大典)'을 만드는 등 이상사회를 꿈꿨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밀고자와 변심자로 인해 발각되어 능지처참되었다.
인조 대 궁중에서는 인목대비의 궁녀들이 흉물을 사용해 왕을 ‘저주’한 사건이 벌어졌으며, 소현세자의 아들이라고 지칭하면서 백성을 현혹한 승려 처경은 ‘조요서요언’, 즉 요망한 말로 혼란을 가져왔다는 죄로 참형을 당했다. 황해도에서 제천의례를 거행하다가 붙잡힌 차충걸과 무당들은 왕실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난언’죄를 받았다. 26명의 역관과 무사들이 모의를 합작했다고 고발했다가 도리어 실성한 사람으로 몰린 혜민서 생도 최태웅은 ‘무고’죄로 처벌받았으며, 내삼청 서원 오재영과 그에게 위조된 신분증을 받아 궁궐에 잠입한 시골 양민 이성세는 궁궐을 훼손하고 침입한 죄인 ‘대역부도’에 해당해 처벌받았다.
조선은 강력한 형벌 제도를 통해 왕조의 존립과 권위를 위협하거나 유교적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모든 백성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데 힘썼다. 역모, 반란, 음모, 난언, 요언을 처결하고 유교 도덕에 어긋나는 행위를 치죄하기 위한 기관인 의금부는 최고의 사법기관으로서 왕의 교지를 받들고 추국을 진행했다. 종래 고려시대에는 순찰의 임무만 담당했던 의금부가 조선시대에 특별사법관청이 된 것은 왕조의 존립을 위협하거나 유교 윤리의 근간을 해치는 작은 행위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국가의 의지 표명이었다.
의금부에서 있었던 추국 기록이 담긴 재판 자료는 비록 추국관의 입장에서 쓴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조선시대를 살아간 민중의 생활상과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또한 체제 전복을 시도하려는 집단에 대응했던 조선왕조의 ‘정권 안정과 체제 유지 시스템’의 이면도 엿볼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의 굴레를 벗어나 사회 변혁의 주체가 되고자 했던 민중의 시도와 실패, 저항과 반란의 역사적 의의를 모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책 속으로소덕유는 길운절의 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그의 병법 해석과 함께 성곽에 관한 그림과 이론을 보고 ‘기발한 재능’이라고 치켜세우는 한편, 지금과 같은 난세에 이러한 재주를 크게 펼칠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는 길운절에게 “대사(大事)에 뜻이 있다면 재능을 쓸 수 있는 방도를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중략) 소덕유가 대사를 위해 제시한 방책은 다름 아닌 제주도였다. (중략) 소덕유는 제주도에서의 거사 추진을 제안했고, 길운절이 이에 동의함으로써 일은 급진전되었다. 그는 길운절에게 자신을 먼저 제주도로 들여보내 머물게 해주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포섭한 뒤 거사 일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_17-18쪽 <제1부 모반대역:="" 길운절과="" 소덕유의="" 역모="" 사건=""> 중에서
궁궐 안의 궁녀, 후궁들이 무당의 방술을 통해 벌이는 저주의 변고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인조 대처럼 빈번한 적은 없었다. 인조와 대신들은 저주 사건이 한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한두 해에 걸쳐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텅 빈 궁궐까지 흉물이 묻혀 있었기 때문에 신분이 낮은 하천배의 소행이 아닌 무리들을 지휘하고 사주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인조는 저주한 범인을 찾아내어 그 죄를 국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대신들의 주청에 따라 이전의 저주 사건과는 달리 신속히 국청을 설치해 죄인들을 심문했다.
_135쪽 <제2부 저주:="" 인조="" 대="" 궁중="" 저주="" 사건=""> 중에서
백성에게 생불, 신승으로 추앙된 처경이 소현세자의 유복자를 자처한 까닭은 어떤 종교적 동기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처경은 소현세자에 대한 항간의 소문을 듣고 자신과 소현세자를 연관시키는 사람들의 행동에 간사한 마음을 먹었다. 그러던 중 소현세자의 사촌인 복창군 집안의 궁녀 중 부처에 심취해 있는 자들에게 그때의 일을 자세히 들어서 스스로도 국가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처경은 왜능화지를 오래된 종이처럼 보이게 하려고 일부러 더럽히기도 하고, 여자가 쓴 것인 양 한글로 글을 쓰는 등 문서를 위조했다. 나아가 1652년생이면서도 소현세자가 사망했던 1645년을 자신의 출생연도로 속여 소현세자의 유복자로서 자신을 조작했다.
_ 179~180쪽 <제3부 조요서요언:="" 요승="" 처경의="" 역모="" 사건=""> 중에서
조선왕조는 초기에 성리학을 수용하고 보급하려는 노력으로 일종의 사상 통제를 실시했다. 이로 말미암아 전통 종교 사상들은 ‘정학(正學)’이 아닌 ‘사학(邪學)’이라 불리면서 배척되고 이와 관련된 서적은 금서로 지목되어 폐기되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와 불안감은 민중의 정서를 동요시켰다. 이에 민중은 다양한 형태로 지배 체제와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항을 시도했고, 공적인 유통 경로를 획득할 수 없었던 정감록, 미륵신앙, 풍수지리설, 도참(圖讖)사상 등은 민중과 결합하면서 정치적.사회적 모순을 배경으로 한 체제 저항의 이념적 틀로 기능했다.
_ 207쪽 <제4부 난언:="" 차충걸의="" 난언="" 사건=""> 중에서
최태웅의 상변서 가운데, 사람들은 항상 분노와 원망으로 말하기를 “하늘이 큰 재주를 주었으니 처음부터 반드시 귀하고 천함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들은 어릴 때부터 활을 다루어 그 재주를 연마한 것이 남들보다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관직에 이르러서는 만 호에 불과하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라는 말은 최태웅이 꾸며낸 말인지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말 속에서 당시 금군 집단이 가지고 있던 사회에 대한 불만을 엿볼 수 있다. (중략) 최태웅 역모 고변 사건은 사실의 진위 여부를 떠나 역관과 무사를 중심으로 한 중인들의 정치적?사회적 진출 욕구가 잘 드러나 있다.
_ 229 쪽 <제5부 무고:="" 어느="" 광인의="" 역모="" 고변="" 사건=""> 중에서
궁궐은 임금의 거처로 지엄한 곳이다. 따라서 임금이 있는 궁성의 수위(守衛)는 국가수비의 핵심이라고 할 만큼 엄격히 행했다. 도성 수비와 마찬가지로 궁성에도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군인 450명이 들어와 숙직했다. (중략) 출입할 수 없는 사람의 궁궐 난입은 궁성을 수비하는 군인이나 국왕에게 놀라운 사건이다. 조선시대에는 궁궐 안 각사의 하급관속이 출입증을 차지 않고 궁궐로 들어올 경우 《대명률》의 궁궐문을 함부로 들어온 조항에 의해 장 100대에 처했다. 칼을 빼들고 궐문 안으로 들어간 경우는 교형에 처했다.
_ 259쪽 <제6부 대역부도:="" 오재영과="" 이성세의="" 대궐="" 침입="" 사건=""> 중에서
유승희 지음/역사의아침/280쪽/14,000원
제6부>제5부>제4부>제3부>제2부>제1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