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에 저항하는 젊은 연극인들의 페스티벌 '권리장전2016_검열각하'가 대학로 연우소극장에서 진행 중입니다. 6월부터 시작해 5개월간 매주 1편씩, 총 20편의 연극이 무대에 오릅니다. CBS노컷뉴스는 연극을 관람한 시민들의 리뷰를 통해, 좁게는 정부의 연극 '검열'부터, 넓게는 우리 사회에 알게 모르게 뿌리박힌 모든 '검열'의 위험성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리뷰 순서="">
1. 우리 시대의 연극 저널리즘 / '검열언어의 정치학 : 두 개의 국민'
2. 포르노 시대 한가운데에 선 나를 보다 / '그러므로 포르노 2016'
3. 그들이 ‘안티고네’를 선택한 이유 / '안티고네 2016' (계속)
연극 '안티고네 2016' 중. (사진=극단 달나라동백꽃 제공)
'안티고네’를 떠올리면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차이나타운’이 떠오른다. 형사 잭 니콜슨이 의뢰인 페이 더너웨이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하자 그녀의 따귀를 때린다. 그가 알기론 페이 더너웨이는 여동생이 없는데 늘 데리고 다니는 여자아이를 여동생이라는 둥, 딸이라고 하는 둥 중언부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둘 다’ 맞았고, 이것은 할리우드 영화 역사상 제일 충격적인 대사 중 하나가 되었다. 잭 니콜슨은 그녀를 그렇게 만든 근친상간에 미친 그녀의 괴물 같은 아버지에 대항한 투쟁을 시작하지만, 비참하게 실패한다.
비극은, 더 이상 갈 수 없고 애초부터 갈 수 없었던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비극은 얽힐 대로 얽힌 가족을 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엄마와 아버지, 아들이 근친상간과 살해로 얽힌 이야기 ‘오이디푸스 왕’에서 더 나아간 ‘안티고네’가 더욱 그러할 것이다.
엄마인 줄 모르고 결혼한 아들이 아버지인 줄도 모르고 아버지를 죽이자, 스스로 장님이 된다. 그런데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차이나타운’처럼, ‘오이디푸스’의 실패는 그만의 실패가 아닌 모든 미래의 실패로 이어진다. 엄마와 아들 사이에 근친상간으로 생긴 자식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러니 어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극 '안티고네 2016' 중. (사진=극단 '달나라동백꽃' 제공)
연극은 ‘안티고네’ 이야기를 모를 관객을 위하여 ‘오이디푸스 왕’의 내용을 사전에 간략하게 설명해 주는 등 비교적 친절하게 시작했다. 아들 둘(에테오클레스, 폴리네이케스)은 왕권에 눈이 멀어 전쟁을 벌이다 함께 죽어버렸다. 얼떨결에 왕위에 오른 외삼촌 클레온은 자신이 지지했던 에테오클레스는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주고, 폴리네이케스는 독수리 밥이 되도록 길가에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모두의 접근을 금지시켰다. 어긴 사람은 단 한명, 흙을 덮어준 안티고네다.
클레온에게 끌려온 그녀는 오빠의 처참한 시신에 흙을 덮어주는 것을 혈육에게 베풀어야 할 마땅한 도리라고 항변한다. 유일 권력자가 된 외삼촌 클레온은 말한다.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고. 다시는 그 시체가 있는 곳에 가지 말라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한다고. 원작은 그 뒤로도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지만 본 연극은 여기에 분명한 방점을 찍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왜 하필 ‘안티고네’를 통해서 ‘검열’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 원저자 소포클레스가 ‘근친상간’이라는 형식을 과감하게 차용한 애초의 이유는 권력의 무상함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모든 권력은 근친상간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상징이 아닐까. 그렇다면 권력이란 근친상간을 내포하고, 권력이 행사하는 검열이란 근친상간보다 더한 ‘자해행위’가 아닐까.
원작에서 극중 모든 인물은 ‘오이디푸스 왕’보다도 훨씬 더 처참한 자멸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왜 다음 이야기로 진행되지 않는가 의문을 품기도 했지만 연출의 숨겨진 의도를 이해하고 나니 전에 못한 훨씬 풍성한 생각을 하게 되는 기회가 찾아왔다.
연극 '안티고네 2016' 중. (사진=극단 '달나라동백꽃' 제공)
혼란스러워진다. 이제 국가가 봉합되었다. ‘가만히 있으면’ 너도 나도 조용히 살 수 있다. 클레온의 입장에서는 타당한 말일 수도 있다. 형제의 싸움으로 갈라졌던 국가를 이제 겨우 봉합했는데, 안티고네의 추모 때문에 또다시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행동일 수 있다. 게다가 자신은 오이디푸스 밑에서 국가 행정 경험을 쌓았다. 또 모든 것이 지나간 일 아닌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안티고네 2016’은 이 모든 ‘합리화’를 넘어 국가권력, 검열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여동생이 처참한 오빠의 시신에 고작 흙 몇 삽 덮어주는 행위를 금지하는 체제와 국가라면, 그것이 존속할 이유가 있을까?”
앞서 말한 방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검열’과 ‘국가권력’에 대해서 보다 새롭게 조망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안티고네 2016’ 제작진과 배우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구본환 / 영화 ‘백두산 호랑이를 찾아서’ 연출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