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밀 로저스. 지난해 한화 이글스 팬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거론된 이름 중 하나다. 그리고 올해도 이 이름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물론 지난해와는 전혀 다른 의미다.
로저스는 지난해 8월 혜성처럼 나타나 한화 마운드에 힘을 실었다. 쉐인 유먼의 대체 외국인 선수로 독수리 군단에 합류한 그는 데뷔전부터 화끈했다. 한국 무대 첫 경기였던 8월 6일 LG 트윈스전에 선발 등판한 로저스는 9이닝 3피안타 7탈삼진 1실점 완투승을 거뒀다. 다음 등판이었던 11일 kt 위즈전에서는 9이닝 3피안타 7탈삼진 무실점으로 완봉승을 수확했다.
데뷔 후 두 경기에서 완투와 완봉으로 2승을 챙긴 로저스는 한화 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한화의 가을야구가 걸린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온 로저스였다.
비록 한화는 뒷심 부족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로저스의 경이적인 투구는 실로 대단했다. 지난해 로저스는 10경기에 나와 6승 2패 평균자책점 2.97의 눈부신 성적을 거뒀다. 6승 가운데 절반을 완봉승으로 장식했다. 9월에 치른 NC전을 제외하면 9경기에서 모두 7이닝 이상을 소화하는 등 이닝이터의 정석을 보여줬다.
이런 로저스를 한화가 잡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한화는 로저스에 역대 KBO 리그 외국인 선수 최고 금액인 190만 달러(약 22억 원)를 안겨주며 재계약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계약은 훗날 최악의 계약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로저스 역시 역대 최악의 '먹튀'라는 오명을 쓸 위기에 처했다. 어쩌다 한화와 로저스가 이렇게 꼬이게 됐을까.
◇ '혹사논란?' 선수를 부상으로 내모는 구단은 없다
한화는 24일 한국야구위원회(KBO)에 로저스의 웨이버 공시를 요청했다고 발표했다. 이미 숱한 의혹이 있었지만 한화 구단은 함구로 일관하다 마침내 로저스와 결별을 공식화했다.
부상이 이유였다. 로저스는 스프링캠프에서 입은 팔꿈치 통증으로 한동안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다. 지난달 8일 1군 무대로 돌아왔지만 이달 4일 삼성 라이온즈전에서 우측 팔꿈치 이상을 호소해 교체됐다. 그것이 로저스가 한화에서 치른 마지막 경기가 됐다.
한화 구단과 더불어 로저스 본인에게도 굉장히 가슴 아픈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늘 밝은 분위기로 팀에 활력소를 불어넣었던 로저스였고, 그런 그를 누구보다 아끼고 챙겨준 한화와 팬들이었기에 더 그랬다.
항간에는 한화가 지난해 로저스를 혹사한 탓에 부상을 입었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주로 중간 계투로 활약한 로저스가 한국 무대에서 선발로 나와 매번 100구 이상의 공을 던지다 보니 무리가 왔다는 게 그 이유다.
실제 로저스는 지난해 10경기에서 총 1130개의 투구 수를 기록했다. 경기당 평균 113구를 던졌다. 수치상으로 보면 무리가 갈 만한 대목이다.
그러나 더 깊숙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로저스의 많은 투구 수는 본인의 의지에서 비롯된 측면이 적잖다. 로저스는 본인이 경기를 마무리짓고 싶어 했고 구단은 선수의 자존심을 위해 그의 의견을 존중해준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소화 이닝 수가 늘었고 투구 수도 증가했다.
매 경기 100개 이상 던지라고 주문하는 구단도, 그리고 그 주문을 거부하지 못해 억지로 던지는 선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부상이라는 이유로 선수가 팀을 떠나다 보니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생기게 된 오해다.
190만 달러의 계약을 맺은 선수를 이런 식으로 떠나보내는 한화 구단은 말 그대로 속이 타들어 가고 있다. 혹사로 인해 몸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면 그런 거금을 안겨줬을 리 난무하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선수와 구단 사이의 끈끈한 유대관계가 형성됐기 때문에 재계약을 한 것이다. 로저스는 한화를 믿었고 한화 역시 로저스를 믿었기 때문이다.
로저스를 가까이서 지켜본 한화의 한 관계자는 "로저스는 늘 밝은 친구였다"면서 "부상을 입었지만 1군 선수단을 따라다니며 좋은 기운을 불어 넣어줬다"고 그를 회상했다. 그의 말에서 느껴지듯이 한화와 로저스 사이의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그들을 지켜보는 시선들이 둘의 관계를 꼬이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