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에 따라 조선 땅 망우리 공원에 묻혀…오늘 85주기 맞아 추모식친형 노리타카가 1945년 한국 떠나며 묘역서 읊은 시도 첫 공개한용운·방정환 등 독립운동가들이 묻힌 중랑구 망우리 공원에는 아주 이례적으로 일본인의 묘도 있다.
묘의 주인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한국 사람의 '진정한 친구'로 살았던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1891∼1931)이다.
다쿠미는 조선총독부 임업연구소에서 근무하며 당시로는 획기적인 '오엽송 노천매장법'이라는 양묘법을 개발했다. 그는 이를 활용해 조선 산림녹화에 힘썼다.
이 덕분에 일본의 목재 수탈로 헐벗은 우리나라 산들은 푸름을 되찾았다.
경기도 광릉의 수목원도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고, 국립산림과학원 정원의 유명한 1892년생 소나무(盤松)도 1922년 홍파초등학교에 있던 것을 그가 옮겨 심은 것이다.
다쿠미는 조선 도자기에 매료된 친형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1884~1964)와 함께 조선 문화예술 보존에 기여한 것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다쿠미는 '조선의 소반', '조선도자명고'와 같은 조선 도자와 민예에 관한 책을 출간하는 등 조선 문화재 연구 성과를 담은 여러 글을 남겼다.
아사카와 형제는 오늘날 국립민속박물관의 기원이 된 '조선민족미술관'을 건립해 자신들이 모은 각종 민예품 수천 점을 기증하기도 했다.
다쿠미는 1931년 식목일 행사를 준비하다 41세의 젊은 나이로 숨지면서 "조선식 장례로 조선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유언대로 자신이 살던 경기도 이문리에 묻혔다가 몇 년 후 망우리 공원으로 옮겨졌다. 이 공원에는 다쿠미 묘 외에 한반도에 포플러와 아카시아를 처음 심은 사이토 오토사쿠의 비석도 남아있다. 사이토 오토사쿠도 이 공원에 묻힌 것으로 알려졌으나 아직 묘를 찾지 못하고 있다.
다쿠미 묘지 옆 추모비에는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 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는 글이 적혔다.
묘역에는 그를 기리려는 한국인과 일본인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고향인 일본 야마나시(山梨)현 호쿠토(北杜)시의 지원으로 정비돼 방문객이 좀 더 편히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다쿠미를 조명한 영화와 책이 만들어지고 추모제와 학술회의가 열리는 등 그를 기리려는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으나, 그의 업적이나 영향에 대한 연구는 사실상 명맥이 끊긴 상태다.
다쿠미 전문가인 김석권 전 국립산림과학원 박사는 "수많은 임업 기술을 개발했고, 광릉 수목원도 모두 다쿠미 작품인데 산림청에도, 학계에도 그를 연구하는 사람이 없다"며 "일본인이라 불편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며 안타까워했다.
올해는 다쿠미가 세상을 뜬지 85주년이 되는 해다.
그의 기일인 2일 노리다카·다쿠미 형제 현창회가 다쿠미 묘역에서 추모식을 열었다.
추모식에는 조만제 현창회 회장과 강지원 '이수현의인문화재단' 설립위원장,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학생 등이 참석했다.
초여름처럼 따뜻한 날씨에 묘지 위로 노란 개나리꽃이 꽃그늘을 드리웠다. 떡, 사과가 올려진 조촐한 제사상에는 노리다카·다쿠미 형제를 함께 기리는 뜻에서 두 잔의 술잔이 올랐다.
이 자리에 참석한 오재희 전 주일대사는 "우리는 과거 한일관계에서 시대적 상처를 갖고 있지만 이런 훌륭한 일본인도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며 "오늘 이 추모가 한일관계 우호 친선에 하나의 가교 구실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두 형제의 고향인 호쿠토시의 아사카와 형제 추모회도 추모사를 보내왔다.
노치환 현창회 사무총장은 추모식에서 노리타카가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조선을 떠나게 되자 다쿠미의 묘 앞에서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심경을 담아 읊은 시를 처음으로 공개했다.
"묘에 핀 들꽃 우리에게 바치고 고이 잠들게. 언젠가 찾아와 줄 사람이 있을 테니."
시를 읽은 최경국 명지대 일어일문학과 교수는 "이 시 구절처럼 다쿠미의 영이 있다면 오늘 모인 우리를 보고 즐거워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식목일인 5일에도 국제친선협회 주최로 다쿠미 추모식이 열린다.
이 자리에는 이순주 서울국제친선협회 회장, 윤태운 한국도예협회 회장, 신현고 학생들과 호쿠토시의 부시장 및 공무원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